‘끝났네…’ 하는 순간 노장의 투혼이 기적을 불렀다
경기가 다 끝났는데도 제주 핀크스 골프클럽(파71·7326야드)을 찾은 갤러리들은 18번홀(파4·490야드)을 떠나지 못했다. 그린 옆 개울 가운데 잔디 부분이 가로 2m, 세로 1.5m쯤 되는 작은 섬 위에 올라가 기념 촬영을 했다. 한 중년 남성은 우산을 들고 빈 스윙을 하며 “이야~” 감탄사를 터뜨렸다. 바로 그 섬이 방금 전 새 역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SK텔레콤 오픈(총상금 13억원) 최종 라운드가 열린 19일은 최경주의 54번째 생일이었다. 5타 차 단독 선두로 출발한 그는 이날 버디 2개, 보기 5개로 3타를 잃었다. 최종 합계 3언더파 281타. 3라운드까지 7타 뒤처졌던 박상현(41)이 따라붙어 동타를 만들었다.
18번홀에서 다시 열린 연장 1차전. 최경주가 친 세컨드샷이 그린 옆 개울로 날아갔다. 다들 ‘끝났네’ 생각했다. 그런데 탄성이 터졌다. 개울 중앙 작은 섬 잔디 위에 공이 떨어져 한 번만 살짝 튀고 안착한 것. 행운이었다. “완도다, 완도!”란 감탄사가 나왔다. 최경주는 전남 완도 출신이다. 최경주는 그 작은 섬 위에 올라가 59도 웨지를 잡고 굴리는 샷을 했다. 이 샷이 홀 가까이 멈추면서 극적으로 파를 기록했다. 승부를 연장 2차전으로 끌고 갔다.
2차전 티샷을 하기 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정말 우승하고 싶다’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 순간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간절함으로 온몸을 다 꼬아서” 티샷을 했다. 공이 전보다 50야드쯤 더 나갔다. 우드 대신 5번 아이언으로 세컨드샷을 할 수 있었다. 이 샷을 그린에 올리면서 최경주는 파를 기록했다. 보기에 그친 박상현을 꺾었다. 최경주는 “손으로 (공을) 놓아도 그렇게 놓을 수 없었다”며 “그 작은 아일랜드에 잔디를 심어 공이 딱 거기 있었는데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로써 그는 KPGA 투어 최고령 우승 기록을 19년 만에 새로 썼다. 종전 기록은 최상호(69)가 2005년 매경오픈에서 작성한 50세 4개월 25일이었다. KPGA 투어 우승은 통산 17번째. 11년 7개월 만이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선 2002~2011년 통산 8승을 거뒀다. 2020년부터는 만 50세 이상이 참가하는 PGA 챔피언스 투어에서 뛰며 2021년 한 차례 우승했다. 최경주는 올해 27회를 맞은 SK텔레콤 오픈에 22번째 출전해 4번째 우승(2003·2005·2008·2024)을 거뒀다. 매번 다른 코스에서 트로피를 들었다.
이번 대회에서 최경주 평균 드라이브샷 거리(1·2라운드만 측정)는 257.2야드로 최하위권(139위)이었다. 그러나 그린 적중률이 1위(69.4%), 평균 퍼트 수 16위(1.76개)였다. 딱딱한 그린, 까다로운 핀 위치, 변화무쌍한 바람에 아들뻘 후배들이 고전할 때 그는 노련하게 풀어갔다.
전성기는 지났지만 투지로 버틴다. 알코올과 탄산음료, 커피를 끊었고 요즘도 하루에 공을 500개는 친다. 경기 시작 전 연습 그린에 반드시 자를 놓고 루틴에 따라 연습한다. 경기 도중 압박감에 시달릴 때 자를 놓고 연습하는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그리면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는 “음주를 끊어야 하고 잠을 잘 자야 한다. 몸에 독이 되는 것은 절대 하면 안 되고 유산소운동과 스트레칭을 꼭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젊을 때는 15분 스트레칭하고 경기 나가도 괜찮았거든요. 이제는 40분을 하고 나가도 어디가 아파요.”
그는 “후배들이 나를 잘 끌어줬다”며 “후배들도 코스를 정복하는 도전 속에서 많이 배웠을 것”이라고 했다. “예전에 우승했을 땐 감정이 이렇지 않았어요. 철없을 때라 잘난 줄 알고. 이번 우승이 제 삶을 확실히 변화시킬 겁니다.” 최경주는 20일 출국해 23일 미국에서 개막하는 시니어 PGA 챔피언십에 출전한다. 챔피언스 투어 상금 랭킹 10위 안에 드는 것이 올 시즌 목표다. 떠나기 전 기적처럼 공을 받아준 작은 섬에 이름을 지어줬다. ‘K J CHOI 아일랜드’. “그 쪼그만 아일랜드는 평생 못 잊을 겁니다. 정말 저는 우승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아일랜드가 거기 있었는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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