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도 어린 게 상사”… 후배 을질도 직장 내 괴롭힘 판결 잇따라
한 공공기관 서비스센터 반장인 A씨는 이 센터를 총괄하는 직속상관 B씨에게 직원들의 비상근무조 편성 현황을 주지 않았다. B씨가 없는 카카오톡 단체방에서만 근무표를 공유했다. B씨가 자기보다 어린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A씨는 수시로 다른 직원들 앞에서 “나이도 어린 여자가…” 하며 불만을 표시했다고 한다. 또 다른 직원들에게 근무 교대가 끝나도 B씨에게 보고하지 말라고 지시하고, 지시를 어기면 “왜 보고했느냐”며 질책도 했다. 의도적으로 B씨를 따돌린 것이다. 2022년 9월 법원은 “B씨가 직원들의 근무 일정을 상시 파악할 필요가 있었는데도, A씨는 피해자를 배제하고 어린 여자가 상급자라는 불만을 표현한 점 등을 볼 때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이 포함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시행(2019년)된 지 5년째에 접어들면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괴롭히는 이른바 ‘직장 내 을질’을 인정하는 법원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근로기준법은 직장 내 괴롭힘을 ‘직장 내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는 등의 행위’로 정의하는데, 아랫사람도 나이나 경력 등으로 직장 내 ‘우위’가 인정될 수 있다는 판례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의 가해자가 ‘후임’이라고 답한 직장인이 11.7%로, 2016년 같은 조사 때 2.7%에 비해 4배 이상으로 늘었다. 법무법인 율촌 송연창 변호사는 “직장 내 괴롭힘 인정에 필요한 ‘관계의 우위성’은 직급을 전제로 하는 개념만이 아니라서 하급자도 괴롭힘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과 합세해 직장 상사를 괴롭힌 경우도 있었다. 한 금융회사에서 3명으로 구성된 팀에서 일한 C씨는 수시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를 크게 내며 키드득거렸다. 그럴 때마다 신경이 쓰였던 선배 D씨는 우연히 C씨의 컴퓨터를 보게 됐다. 대화 상대방이 다름 아닌 팀장이었던 것이다. D씨는 회사에 고충을 호소했고, 조사 결과 두 사람이 뒷담화와 따돌림을 일삼았던 사실이 드러났다. 사내 메신저로 ‘미친X’ ‘개또라이’ ‘개노답’ ‘극혐’ 등 욕설을 주고받았고, C씨는 여성인 팀장에게 “누나(팀장)도 하자. 고개도 돌려야 해. 한숨도 푹푹 쉬어주고...”라며 괴롭힐 방법도 공유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2021년 9월 서울행정법원은 C씨에 대해 “피해자보다 직위가 낮지만 단 세 명으로 구성된 팀에서 가장 선임자인 팀장과 합세하는 수법으로 상급자를 괴롭혔다”고 했다.
대놓고 사임을 요구하는 사례도 있다. 한 공장에서 하급자 19명이 그룹장 E씨의 사임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걸고 연판장을 돌렸다. 이들은 피켓 시위도 하고 홍보물도 뿌렸다. 이로 인해 E씨는 신체·정신적 고통으로 치료를 받았다. 2022년 12월 중앙노동위원회는 “19명 중 16명은 피해자보다 나이도 많고, 근속 연수도 길다”며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했다. 이들은 가담 정도에 따라 감봉 1개월~출근정지 2개월 등의 징계를 받았고, 중노위는 징계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직장 내 괴롭힘’ 제도를 악용하는 ‘을질’도 있다. 한 신입 사원은 입사지원서에 허위 경력을 적었다가 들통 나 징계 절차가 시작되자, 소속 부서장 등을 거꾸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진정했다. “회사가 업무에서 배제하고 인사상 불이익을 줬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또 다른 직원들을 성추행과 명예훼손 등으로 마구 고소하고,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냈다. 하지만 모두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고, 소송도 기각됐다.
또 다른 회사 직원 F씨는 “업무 지시가 구체적이지 않아 못 알아듣겠다”며 업무 관련 부서장 전체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노동청에 진정했다. “전산망 패스워드를 안 알려준다” “일을 주지 않으며 괴롭힌다”고도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모두 거부됐다. 그러자 F씨는 회사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등 소송을 제기했다. 그의 거듭된 진정에 본부장 등 여러 상급자가 퇴사했다. 법무법인 YK 조인선 변호사는 “직장 내 괴롭힘 제도의 악용은 그 자체가 직장 내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이기 때문에 엄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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