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기상천외 ‘동일인’, 개념부터 폐기를
종합부동산세와 전세(傳貰), 재벌의 공통점은 다른 국가들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한국 유일의 개념이라는 점이다. 재벌을 영어로 번역할 말이 마땅치 않다 보니 국내외 학자들은 한국어 발음을 영어로 옮겨 ‘재벌(Chaebol)’이라고 쓴다고 한다. 재벌 총수를 뜻하는 공정거래법 용어인 ‘동일인(同一人)’의 경우 지배주주라는 의미로 ‘컨트롤링 쉐어홀더(Controlling shareholder)’라고도 하는데, 실제와 맞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컨대 태영건설 지배주주는 지주사 티와이홀딩스 최대 주주(지분율 25.4%) 윤석민 회장인데, 공정거래위원회는 부친 윤세영 창업회장을 동일인으로 본다. 윤 창업회장의 지주사 지분율은 0.5%에 그치지만, 인사 등으로 회사를 장악하기 때문에 그를 일인자로 보는 것이다. 이런 취지로 국내외 영어 논문에서 동일인이 ‘재벌 헤드(Chaebol head)’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역시 한계가 있다. 농협의 동일인 농업협동조합중앙회처럼 ‘주인 없는 회사’의 동일인이 법인인 경우를 설명할 수 없다.
올해 37주년을 맞은 대기업 집단과 동일인 지정 제도를 놓고 논란이 많다. 토종 한국인 오너 일가 중심의 지배 구조에서 편법 상속과 경제력 집중 병폐가 심각했던 시절에 도입된 용어와 제도를 주주 자본주의가 널리 퍼진 지금에도 그대로 붙들고 있는 게 맞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논란에 불을 붙인 건 2021년 대기업 집단이 된 쿠팡의 김범석 의장이다. 공정위가 지난 15일 발표한 올해 대기업 집단 지정 결과, 그는 친인척의 계열회사 주식 등을 엄격하게 감시받는 동일인 지정을 4년 연속 피했다. 공정위가 시행령까지 바꿔 기준을 마련, 김 의장 일가를 족쇄에서 풀어줬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의장은 국적만 미국인일 뿐 국내 최대 이커머스 기업의 ‘재벌 헤드’고, 미국 모회사 의결권을 쥔 ‘컨트롤링 쉐어홀더’다. 반면 쿠팡 입장에선 외국인이 한국에서 큰 사업을 일궜을 뿐 다른 외국계 기업과 다를 게 뭐냐고 항변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논란에 대해 공정위가 한국어로도 명쾌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면서 철 지난 제도를 폐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공정위는 일부 재벌가 편법 상속·증여를 막아야 한다며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투명한 공시가 정착되고 주주 감시망이 촘촘해진 만큼 점차 설득력을 잃고 있다. 기업 국적의 경계가 점차 허물어지면서 또 다른 ‘쿠팡’ 사례가 나올 수 있는데, 그때마다 또 시행령을 바꿀 텐가. 기업집단 주력 회사를 중심으로 계열사 간 내부 거래 공시 시스템을 만드는 등 최소한의 장치는 유지하되 철 지난 유물들은 버릴 때가 됐다는 생각이다. 당장 세계 공용어인 영어로 번역할 수도 없는 ‘동일인’이라는 기상천외한 개념부터 폐기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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