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찬구의 스포츠 르네상스] 신태용·박항서·히딩크 마법의 비결
인도네시아 신태용도 2002 히딩크도 선수들의 ‘승리 멘털’ 심어줘
프랑스전 석패 후 만족한 대표팀에 불같이 화낸 히딩크 기억하라
우리는 약자의 승리 스토리에 감동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대결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서 다윗은 절대 강자 골리앗에게 맞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승리를 거뒀다. 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약점이 드러나는 근접전을 피하고 돌팔매라는 필승 카드로 전투에 임했다. 오늘날 스포츠에는 또 다른 다윗과 골리앗들이 있다. FIFA 랭킹 23위 한국이 134위인 인도네시아에 패한 지난 4월 U23 아시안컵 8강전의 서사도 그러하다. 인도네시아는 한국 상대 전적 2승 4무 30패에 불과했지만 50년 만에 승리했고 내용에서도 앞섰다. 점유율이 높았고, 유효 슈팅 수는 3배가 많았다. 이 스토리의 중심에는 영웅 신태용 감독이 있다. ‘승리하는 약팀’을 만들어낸 리더의 비결은 무엇일까? 신태용뿐 아니라 베트남 ‘쌀딩크’ 박항서, 2002년 4강 신화의 히딩크 등은 어떤 ‘매직’을 발휘한 걸까? 단기간에 다른 팀이 된 것처럼 성과를 발휘하게 만든 리더의 스토리를 살펴보자.
리더가 제시하는 비전과 신념 체계가 그가 쌓아온 시간에 대한 존경과 신뢰로 뒷받침될 때 약팀은 강팀의 마음을 가지고 게임에 임할 수 있다. 2002년 5월 월드컵 직전 평가전에서 세계 랭킹 40위권의 한국 대표팀은 랭킹 1위 프랑스에 2대1로 앞서다 2대3으로 역전패한다. 만족하는 선수들에게 히딩크는 불같이 화를 냈다. 이겨야 할 경기를 졌다는 것이다. 히딩크는 16강 이탈리아전을 앞두고 8강전에 대비해 스페인 분석에 나섰다. 이탈리아는 무조건 이긴다는 메시지였다. 네덜란드 대표팀을 월드컵 4강으로 이끌었고, 레알마드리드 감독으로 지네딘 지단과 루이스 피구 같은 세계적 선수들을 지도했던 히딩크의 “너희는 저들을 이긴다”는 메시지는 선수들을 각성시켰다.
인도네시아 대표 선수들도 한국전을 앞두고 인터뷰에서 승리를 이야기했다. 지키려고 하지 않고 이기고자 공격적으로 경기에 나섰다. 오히려 한국팀이 수비적이었다. “나를 믿어라. 우린 결승까지 간다. 그 자신감이 우리를 4강으로 이끌었다. 인도네시아 축구는 상승세다. 어떤 팀과도 싸울 수 있다.” 한국을 이긴 신태용의 인터뷰다. 러시아 월드컵 한국 대표팀 감독을 지낸 신태용이 가진 경험에서 발현되는 신념과 눈높이는 인도네시아 선수들의 자의식을 바꿔놓았다.
박항서는 2017년 동남아시아 축구 약소국 베트남 대표팀 감독에 부임해 이듬해 AFC U23 챔피언십에서 팀을 결승에 진출시키고, 성인 대표팀을 역내 국가 대항전 AFF스즈키컵에서 우승시켰다. 필자는 그 직후 베트남 대기업 빈 그룹이 유럽식 시설을 투자, 10년간 유소년을 육성해 온 PVF아카데미를 방문해 당시 U19 대표팀 감독이자 PVF아카데미 디렉터였던 호앙 안 뚜언과 이야기 나눈 적이 있다. 박항서의 아이들 다수가 호앙의 제자였다. 그에게 갑자기 나타난 외국인이 1년도 안 되어 찬사를 가로챈 것이 억울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는 박항서에게 선수들의 능력을 의미 있게 바꿔놓기 위한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2002 월드컵 4강 코치였던 박항서가 제시하는 목표와 눈높이, 그리고 선수들에 대한 인정과 긍정의 메시지가 훈련과 경기에 임하는 정신을 바꿔놓았기 때문에 차원이 다른 결과가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수십 년 올림픽을 취재해 온 한 베테랑 기자는 올림픽에서 동메달은 단점이 적은 선수가 차지할 수 있지만, 금메달은 확실한 장점을 가진 선수 몫이라고 했다. 이기는 팀의 리더는 약점을 보완하고 확실한 필살기를 갖추게 해 승리를 준비한다. 훈련과 전략 수립 과정에서 선수들은 다소 막연했던 리더의 목표와 비전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머리로 이해한다. 약팀은 경험, 기술, 체력, 정신, 전술적 이해 같은 요소에서 초기 성장 곡선이 가파르다. 빠르게 보완되고 강화되는 성장의 느낌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이기려는 의지를 품게 된다.
유럽의 강팀들은 시즌을 마친 직후 소진한 상태로 월드컵 조별 리그를 시작한다. 2002년에 상대적으로 오래 준비한 한국팀은 처음 도입한 과학적 훈련으로 갖춘 체력과, 기술 부족을 보완할 수 있는 협력 수비로 그들을 조별 리그부터 밀어붙였다. 루이스 피구가 공을 잡을 때 세 한국 선수가 둘러싸 공을 빼앗는 장면은 전에 없던 모습이었다. 한국적 위계질서가 소통에 방해되자 수평적 문화를 만든 것이나, 악과 깡만을 강조하던 스포츠에서 정신력이 어떤 상황에서도 실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항상심이라고 재정의해 준 것도 팀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과정이었다.
신태용호는 활동량과 압박으로 상대의 공간을 지워나갔고, 약점인 허술한 조직력이 드러날 여지를 최소화했다. 체계적 훈련 경험이 부족했고 식단에 문제가 있었던 팀을 스포츠 과학에 입각한 트레이닝과 식단 조절로 단기간에 끌어올렸다. 이를 통해 장점인 스피드가 강화되었고, 약속한 압박 전술과 공격 패턴을 준비해 승리 공식을 만들었다. 체격 약점과 부족한 포지션 보강을 위해 라파엘 스트라위크 등 인도네시아계 네덜란드 선수를 영입했다.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사안이었으나, 신태용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이를 가능하게 했다. 2017년 U20 한국 대표팀 준비 과정에서 아들 신재원을 공정성을 이유로 제외한 일화가 부정부패가 만연한 인도네시아 축구계에서 주목받으며, 신태용은 원칙과 진정성을 가진 리더로 여론조사에서 90%가 넘는 지지를 받았다.
스포츠의 승부는 물론 개인의 삶과 기업, 국가 경영도 불확실한 미래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위축되어 눌러앉느냐, 아니면 담대하게 도전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이 과정에서 비전과 신념을 부여하고 승리 방정식을 제시하여 확신을 가지고 도전할 수 있게 하는 리더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최빈국에서 상상하지도 못했던 수준의 경제, 문화 강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에도 위닝 멘털리티를 이식, 선도한 리더들이 있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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