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팔이’ 아닌 새 이야기 양식을 찾아서…<태일이> 최호철

한겨레21 2024. 5. 19.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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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21WRITERS 최호철②] 경계에서 한계를 밀어붙이는 작가
최호철 작가가 그린 높은 시청과 도로, 그리고 낮은 마을의 모습. 최호철 제공

◆<태일이> <을지로 순환선> 최호철 작가의 이야기가 앞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그림 한 장에 장편 서사를 담다’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527.html)◆

높은 도로와 관공서, 낮은 원주민들의 동네

그는 진화하고 있었다. 그의 진화의 힘은 ‘밀려나는 존재’에 대한 그의 한결같은 관심이다. 이전에 밀려나던 존재는 동네에서 쫓겨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밀려나는 존재는 동네 자체가 아닌가, 그는 질문하고 있었다. 밀려난 존재에 대한 관심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없되 밀려나는 것이 변했음을 예리하게 묻는다는 점에서 그는 진화하고 있었다. 그는 동네를 채우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에서 장소 자체의 이야기를 듣는 작가로 진화하고 있다.

“서울 외곽은 서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입니다. 이를테면 경기도 광주 초월 쪽을 지나는 산이 되게 멋있습니다. 그 산 주변에는 공장이 있어요. 초월공단이라고요. 그 옆에는 꽤 큰 공동묘지가 있는데 서울 사람들이 와서 묘소로 쓰지요. 그 동네에는 고철이 가득해요. 서울에서 처리하지 않는 것을 처리합니다. 하지만 서울의 일입니다.

그 동네에 초등학교도 있고 그곳에 사는 원주민도 있습니다. 서울에서 밀려난 묘지와 화장터 그런 사이사이에요. 그런데 그런 원주민의 동네는 그림으로 그리면 아주 낮아져 있습니다. 그 위로는 도로가 개발돼 방벽처럼 지나갑니다. 관공서 같은 것도 높게 위로 들려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마을은 이제 내려앉은 바퀴 밑에 깔린 마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공간 자체를 그리지 않으면서 그 밑 사이사이에서 꼬물꼬물 농사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그리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게다가 저 도로와 관공서는 그 동네에 먼저 터를 잡은 사람들에 대한 존중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반복돼 취재해보면 그 마을 주민들도 내가 이 동네에 산다는 느낌을 갖기보다는 빨리 땅 팔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더 큽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장소가 밀려나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밀려나는 장소가 더 크게 그려지고 그만큼 사람들의 이야기는 작아지지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저에게는 숙제입니다.” 

그는 끝까지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의 사연을 듣고 기록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감성팔이’ ‘사연팔이’와 구분되는 이야기 양식

최호철 작가가 산자락 마을의 모습을 그린 <경기도 광주 송정동-내려앉은 마을>. 최호철 제공

“사람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다보니 저는 돌아다니면서 크로키 하기를 좋아합니다. 작업실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만난 사람을 크로키 하면 그 사람의 사연을 짐작하고 상상하고 읽게 됩니다. 옷차림새와 표정, 그리고 손과 얼굴의 색깔과 주름 등 무늬가 말해주는 것이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크로키를 하는 유튜브를 했습니다. 조회 수가 2천이 넘어가니 비판이 들어오더군요. 허락받지 않고 영상을 올리는 것은 사생활 침해이고 범죄는 아니더라도 당사자는 기분 나쁠 것 같다고요. 아차 했습니다. 맞는 말이잖아요. 그래서 바로 그만뒀습니다. 그러나 창작자로서는 매우 곤란한 처지가 됐습니다. 내가 사람의 사연을 상상하고 창작하는 영감의 원천이 바로 지나다니면서 막 본 거를 그리는 건데 그걸 할 수 없게 됐어요. 그러니 의도적으로 사람을 피해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있습니다. 창작자로서 사람의 사연을 듣고 기록하는 다른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가 겪는 어려움은 많은 인류학 연구자가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처럼 순진하게 인류학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좋은 일이다. 타인의 삶의 모습과 이야기를 함부로 채록해 허락 없이 인용하는 것은 금지돼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전에 계획된 구조화된 질문으로만 사람의 삶을 연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류학의 거장 클리퍼드 기어츠가 불법으로 규정된 닭싸움을 구경하다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들을 피해 엉겁결에 현지인과 같이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내부인’으로 취급되지 못했을 것이고 심층 놀이로서의 닭싸움에 대한 중증기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문제는 하나 더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는 다른 사람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네 사연을 듣고 싶지 않아’라는 말이 너무 자연스러운 멘트가 돼버렸습니다. ‘감성팔이’ 혹은 ‘사연팔이’라고 비하합니다. 사연이 아닌 이야기가 없는데도 말이지요.”

최호철 작가의 작품. 김진수 선임기자

경계에 서서 한계를 밀어붙이는 작가

헤겔의 말처럼 모든 보편성은 구체성을 통해서만 현현된다. 그러나 지금 동시대에 공통의 경험으로서의 보편성은 불가능해졌다. 사람의 사연을 읽고 보편성을 읽어내려는 ‘읽는 존재’로서의 독자가 사라졌다. 그 자리는 대신 읽어주는 깔끔하고 친절한 해설이 대신했다. 지금 이야기 창작의 위기는 사실상 독자가 소멸하고 있다는 사실과 직결된다.(아마 이 글을 읽다 여기까지 오지 않고 그만둔 사람들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최호철이라는 작가의 사연을 왜 구구절절이 들어야만 하는가 하고 말이다.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 안에서 보편성을 생각해보려는 사람들이 여기까지 읽으셨을 것이다.)

“저는 그래서 사연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양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사연 자체를 비하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잘된 작품들 모두에 다 사연이 있잖아요. 그리고 그런 사연을 듣는 것을 여전히 사람들은 좋아하지요. 그러니 대중이 감성팔이/사연팔이라고 말하는 그 양식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뛰어넘어 새로운 양식을 발견해야 할 때입니다. ‘팔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방식으로 사연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양식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에필로그

2024년 3월19일 최호철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전시된 서울 성수동의 한 카페에 앉아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인터뷰를 마치며 내가 오늘 그를 만나기 전부터 그가 어떤 작가인지 미리 마음에 품고 왔다고 말했다. 나에게 그는 경계에 서서 한계를 밀어붙이는 작가다. 동시대의 대중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대중과 소통하는 동시대적 양식을 찾아내기 위해 그는 미술과 만화의 경계, 대중문화로서의 만화와 예술로서의 만화의 경계에 서서 그 한계를 가늠하고 돌파하려고 한다. 동시대의 화려함에 의해 보이지 않는 ‘밀려나는 존재’를 응시하기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동시대를 함께 읽는 독자의 탄생을 위한 작품 양식을 찾겠다는 그에게 언젠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글과 그림으로써 공동작업을 제안하며 헤어졌다. 그의 수락을 <한겨레21> 지면에 명토 박으며 글을 마친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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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목록

<태일이> 2009년 전 5권으로 돌베개에서 완간. 부천만화대상 수상. 20여 년을 마음에 담고 있던 작품으로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등을 바탕으로 전태일의 실제 삶에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을지로 순환선> 2008년 거북이북스 펴냄. 그림일기장으로 봉천동 달동네, 신도림역, 와우산길, 수지 가구공단, 버스기사 아저씨, 일본 대사관 앞 등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최호철의 걷는 그림> 2010년 두보북스 펴냄. 25년간 그려낸 130여 권에 이르는 크로키 북에서 간추려낸 크로키들로 구성된 이 책은 평범한 삶의 모습을 진솔하고 재치 있게 담아냈다.

<펜 끝 기행> 2010년 디자인하우스 펴냄. 같은 대학 교수인 만화평론가 박인하와 함께한 여행기. 일본, 이탈리아, 스위스, 중국을 거쳐 울릉도와 독도에서 마무리. 두 사람이 바라보는 만화적인 세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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