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에서 축사로 히트 치기 [삶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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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로부터 청첩장을 받았을 때만 이 동네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한복 입은 여성이 단상에 올라 축사를 시작할 때, 그의 지인인 나도 키득대며 휴대폰 타이머를 눌렀다.
"영 나쁘지는 않았나 봐. 그러잖아도 아들 친구 여러 명이 부탁하더라네. 결혼식 영상 중 내 축사 부분만 편집해서 보내달라고. 자기들 결혼식 때 참고 자료로 쓰겠다나 뭐라나.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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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로부터 청첩장을 받았을 때만 이 동네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토요일 오후 2시. 서울 청담동 어느 웨딩홀에서 진행되는 지인 아들의 결혼식에 갔다. 예식 시작 30분 전에 도착했는데도 식장 안은 수백 명에 이르는 정장 차림 하객들로 가득했다. 커다란 홀에 대여섯 명씩 모여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흡사 시상식을 앞둔 파티장 같은 풍경이었다. 아마도 성장(盛粧)한 30대 초반 청년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더 그랬던 듯하다. 오늘 주인공인 신랑 신부가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지, 얼마나 유연하게 주변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살고 있는지 한눈에 가늠이 됐다.
거기 뷔페 음식이 서울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맛있다는 리뷰까지 촘촘하게 챙긴 터라 곧장 식당으로 가고 싶었지만, 교양인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기로 했다. 지인들에게 인사하고 나서 뒷자리에 착석했다. 결혼식은 깔끔하게 진행됐다. 양가 혼주 입장에 뒤이은 신랑 신부 동반 입장. 주례 없는 혼인 서약과 성혼선언문 낭독이 5분 만에 끝났다. 곧이어 "양가 부모를 대표해, ○○중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재직 중인 신랑 측 어머니께서 축사를 해주시겠습니다"라고 사회자가 말하자 내 앞에 앉은 청년이 일행에게 속삭였다. "일동, 주목! 이제부터 졸지 말고 교장 쌤의 훈화 말씀을 경청합시다." 곳곳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한복 입은 여성이 단상에 올라 축사를 시작할 때, 그의 지인인 나도 키득대며 휴대폰 타이머를 눌렀다. 어디, 10분만 넘겨봐라. 하객을 향한 의례적 인사말 후 그는 며느릿감을 사진으로 처음 보던 5년 전을 회상했다. "아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본 순간, 저는 생각했어요. 아, 여자를 보는 눈이 높은 건 부전자전이구나." 왁자한 웃음이 잦아들 즈음, 그가 맞은편 신랑 신부에게 세 가지를 당부한다고 말을 이었다. "첫째,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전적으로 서로의 편이 되어주렴. 이것만은 깨지 않는 철칙으로 지키면 좋겠어. 둘째, 배우자가 힘들어하거나 아픈 일을 겪을 땐 충고나 조언 대신 꼭 안아주고 따스한 음식을 함께 먹었으면 해. 셋째, 늘 주변을 살피면서 작은 도움이라도 베푸는,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
나이 든 하객들은 자세를 고쳐 앉고, 청년들의 눈빛은 또렷해졌다. 그리고 교장 선생님의 마지막 말이었다. "사랑하는 ○○아, ○○야. 너무 가깝지 않은 거리에서 우리가 언제나 너희를 응원할게." 2분 48초. 흠, 꽤 멋진 축사군.
다음으로 이어진 신랑과 친구들의 노래도 더없이 근사했지만, 맛있는 뷔페 테이블에서 화제의 중심은 단연 교장 선생님의 축사였다. 어른들은 조곤조곤 마음을 담아 전하는 신랑 엄마의 세 가지 당부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고, 신랑과 비슷한 나이대의 청년들은 자기들도 '너무 가깝지 않은 거리'에서 응원해 주는 부모를 열렬히 원한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음 날, 짧고 굵은 축사로 히트 친 교장 선생님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축사가 꽤 근사했다고 말했더니 그가 겸손을 가장한 말투로 으스댔다. "영 나쁘지는 않았나 봐. 그러잖아도 아들 친구 여러 명이 부탁하더라네. 결혼식 영상 중 내 축사 부분만 편집해서 보내달라고. 자기들 결혼식 때 참고 자료로 쓰겠다나 뭐라나. 흐흐흐."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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