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텔’ 몰며 R&D 예산 깎더니 “예타 폐지”…방향 없는 정책

김윤나영 기자 2024. 5. 19. 20:5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4조6000억 삭감 후 비판 커지자 급선회…‘일관성 부족’ 지적
민주당, 법 개정 반대…과학계도 “부실 사업 거름망 사라져”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7일 연구·개발(R&D) 분야 예비타당성조사(예타) 전면 폐지 방침을 밝히면서 정부가 관련 작업에 착수했다. R&D 분야 예타를 폐지하려면 국회에서 관련 법 개정이 필요한데, 야당 반대가 예상되는 만큼 정부는 우선 법 개정 없이 행정처분으로 우회할 길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과학계에서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과학 이권 카르텔을 잡겠다’며 R&D 예산을 대폭 삭감한 정부가 갑자기 R&D 예타 폐지로 급선회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고, 정책에 대한 신뢰성과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19일 통화에서 “R&D 예타 전면 폐지는 국가재정법 개정 사항이라 정부가 개정안을 발의하거나 국회의원 입법으로 준비해야 한다”며 “과도기적으로는 현행 예타 면제제도를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R&D 예타를 전면 폐지하려면 국가재정법과 과학기술기본법을 개정해야 한다. 국가재정법은 ‘총사업비가 500억원 이상이고 국가의 재정지원 규모가 300억원 이상인 신규 사업에 대해 예타를 실시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예타 실시 대상 사업으로 토건사업과 함께 국가연구개발사업을 명시했다. 과학기술기본법도 국가연구개발사업 중 예타 대상 사업 선정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다.

하지만 원내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은 R&D 예타 전면 폐지에 부정적이다. 황정아 대변인은 전날 논평에서 “R&D 예타 개선은 현장 연구자들의 의견을 반영한 절차나 방식, 내용을 개선하기 위한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지, 무턱대고 폐지만 하라는 뜻이 아니다”라며 “제도 개선 없이 예타만 폐지되면 현장 연구자들의 의견을 듣기는커녕, 정부 내 한두 사람이 마음대로 예산을 편성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171석의 민주당 협조 없이 예타 전면 폐지는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정부는 일단 야당의 협조를 구하지 않는 우회로를 찾을 것으로 보인다. 국가재정법은 “지역균형발전, 긴급한 경제·사회적 상황 대응 등을 위해 국가 정책적으로 추진이 필요한 사업”의 예타를 면제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특히 ‘국가 정책적으로 추진이 필요하여 국무회의를 거쳐 확정된 사업’은 예타를 면제할 수 있다. 일종의 ‘패스트트랙’ 제도가 있는 셈이다.

과학기술계와 시민사회도 예타 전면 폐지에 부정적이다. 신명호 전국과학기술노조 정책위원장은 “지금도 대통령이 지정한 사업은 R&D 예타를 얼마든지 면제할 수 있고, 예타를 전면 폐지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며 “오히려 예타를 일괄 폐지하면 엉망진창인 사업들을 걸러낼 수 있는 거름망이 사라진다. 이는 예타를 내실화하라는 과학계나 시민사회의 요구와도 맞지 않다”고 우려했다.

정부의 R&D 예산 정책 기조가 일관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 대통령이 지난해 6월 ‘과학계 이권 카르텔’을 비판한 뒤 정부는 올해 R&D 예산을 지난해보다 4조6000억원 일괄 삭감했다. 김두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R&D 예산을 대폭 삭감해놓고 비판이 커지자 갑자기 예타를 없애는 정책으로 선회하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며 “정부 정책의 일관성, 방향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재정건전성을 강조하며 강력한 지출 구조조정을 예고한 상황에서 R&D 예산이 늘면 그만큼 다른 예산은 줄어드는 풍선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신 위원장은 “정부가 일괄 삭감한 예산을 내년도에 전면 복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며 “정부의 관심 분야에만 R&D 예산이 늘어난다면 학생 인건비 감소 등 현장의 어려움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김윤나영 기자 nayoung@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