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엇갈린 두 가지 개혁이 남긴 것
‘개혁’이란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침’이란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사회적 합의가 어려운 제도일수록 개혁에 이르는 길도 험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충분한 사회적 대화를 거쳐 참여자들이 수긍할 수 있는 개혁의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이야말로 그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준이라 할 수 있다. 해묵고 어려운 숙제일수록 손대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2024년 5월, 한국 사회는 두 가지 개혁의 엇갈린 행보를 마주했다. 연금개혁과 의료개혁이다. 연금 제도에 마지막으로 손을 댄 것은 2007년, 의대 정원을 늘린 것은 1998년이 마지막이다.
연금개혁이 급해진 것은 현재 보험료율 9%를 유지해서는 국민연금 고갈이 불가피하다는 계산 때문이다. 국민연금 재정추계위원회가 지난해 새로 계산한 결과 국민연금 적립기금은 2040년 1755조원으로 최대치를 찍은 뒤, 2055년에는 기금이 모두 소진돼 47조원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노인빈곤이 심각한 한국에서 국민연금의 역할이 큰 데다, 세대 갈등까지 심각해지면서 연금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후 첫 국회 시정연설에서 연금·노동·교육 개혁을 언급한 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가 2022년 7월 출범했다. 산하 민간자문위원회가 결론을 내지 못했고, 이후 올 1월 말 공론화위원회가 구성돼 3개월간 사회적 공론 과정을 거쳤다. 정부는 자료만 충실히 제출했을 뿐 정부안을 만들지 않았다. 공론화 과정에 참여한 시민대표단은 학습, 숙의토론의 과정을 함께한 뒤 ‘보험료율 13%·소득대체율 50%’의 ‘더 내고 더 받는 안’을 최종 선택했다.
애써 공론화 과정을 거쳤으나 오는 29일 폐원을 앞둔 21대 국회도 연금개혁에 실패할 것이 확실시된다. 국회 연금특위 내에서 소득대체율을 놓고 여야 합의에 실패해서다. 윤 대통령이 지난 9일 “22대 국회로 넘겨서 좀 더 충실하게 논의하자”고 말하면서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보험료율 13%’라도 결과로 남겨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졌지만, 22대 국회가 원점부터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할 상황이다.
연금개혁은 공론화 이후 정부·국회가 힘이 빠져버린 반면, 정부가 추진한 의료개혁은 지난 2월 이후 속전속결로 페달을 밟았다. 정부는 의료인력 확충, 지역의료 강화,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공정 보상 등을 주요 과제로 하는 ‘필수의료 패키지’를 발표했다. 27년간 의사 수를 늘리지 못해 향후 의사 부족이 예상되고, 수도권에 집중된 의료역량, 고위험·저보상으로 기피 현상이 심해진 필수의료 체계를 재정비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등 국민들이 겪는 불편도 컸다.
그러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이라는 숫자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말았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의대생들이 휴학에 나섰다. 의대 교수들이 집단 사직과 휴진으로 뒤를 이었다. 진료 차질로 중증환자들의 불안과 피해가 100일 넘게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2000명에서 물러설 수 없다고, 의료계는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맞섰다. 2000명이어야 한다는 과학적 근거에 대해서도, 절차적으로 논의가 제대로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도 정부와 의료계 입장이 전혀 달랐다. 같은 보고서, 같은 회의를 놓고도 각자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듯했다. 대화의 물꼬를 트지 못하는 사이 결국 결정은 사법부에 의해 내려졌다. 서울고법이 의료계의 의대 증원·배분 집행정지 신청에 대해 각하와 기각 결정을 내리면서 정부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의사들이 병원에 돌아올 수 있게 퇴로를 만들고, 국민 눈높이에 맞는 의료개혁을 “뚜벅뚜벅” 보여줘야 하는 건 이제 정부 몫이다.
‘제도를 새롭게 고친다’는 의미에서 연금개혁은 이번에도 실패했고, 의료개혁은 여러 과제를 안은 채 첫발을 떼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기금이 소진돼 지속 가능성이 우려되는 상황에서도 연금개혁을 실기한 후과가 얼마나 클지, 의·정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채 시작된 의료개혁이 앞으로 의료 서비스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막연하고 우려스럽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정부와 국회가 책임있는 자세로 나서고, 이해관계자와 시민들이 각각의 의견을 포용하고 합의에 도달하는 개혁을 기대하기에 한국 사회의 갈 길이 여전히 멀다는 것이다.
이윤주 정책사회부장 run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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