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권의 손길]돌봄 살인

기자 2024. 5. 19.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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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장애 아들을 살해한 아버지
40년을 보호자 이름으로 살았다
벼랑 끝에 몰리며 죽음을 택했다
사회는 그 생명을 돌보기 위한
책무를 다했는가? 묻고 싶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지난 5월3일 대구지방법원 법정에서 예순이 넘은 아버지가 토로한 절규에 가까운 참회였다. 도대체 아버지는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이토록 고통스러워했던 걸까?

아버지의 비공식적인 죄명은 ‘돌봄 살인’이었다. 아버지는 지적 장애가 있는 서른아홉 살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장에 섰다. 1984년 아이가 이 세상에 온 이후 아버지는 직장도 그만두고 아이의 돌봄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아들이 스무 살이 되자 시설에 맡기기도 했지만 10년 만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더는 혼자서 움직일 수 없는 아들과 재활병원에서 6년을 보냈다. 그사이 아들은 몸을 조금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우울증에 걸렸다.

아버지를 무너뜨린 건 2021년에 일어난 교통사고였다. 발가락 절단을 비롯한 여러 손상을 입었지만 합의금은 고작 50만원이었고, 교통사고 치료를 지원하던 보험사는 치료비와 약제비를 반환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거의 40년 동안 아들을 지극하게 돌보던 아버지의 선택은 아들을 보내고 자신도 목숨을 끊는 일이었다.

법정에서 검사는 징역 5년을 구형하며 말했다. “피고인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40년간 아들을 돌봤다. 희생과 노력이 안타깝다. 그러나 생명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사회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검사의 말은 옳다. 하지만 이 말엔 우리가 함께 돌아봐야 할 내용도 있다. 사회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절대적 가치를 지닌 생명이라면, 그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사회는 무얼 하고 있는가? 사회는 그 생명을 돌보기 위한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

김영옥과 류은숙은 <돌봄과 인권>에서 이렇게 쓴다. “사회가 안 하거나 못하고 있는 돌봄이 떠넘겨지는 자리, 건강한 사람들이 인간의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을 보지 않아도 되게 하는 자리, 그것이 ‘보호자’라는 자리다.”

대개 이 ‘보호자’의 자리는 가족의 몫이 된다. 앞의 사건에선 아버지가 돌봄을 전담했지만 대체로 여성, 특히 엄마의 몫이 된다. 사회가 누군가에게 보호자라는 딱지를 붙이는 순간, 보호자가 된 이들은 단순한 법적 의무를 넘어 돌봄을 수행하는 주체로서 도덕적 의무마저 지게 된다. 심지어 미성년자조차도 ‘보호자’로 호명되는 순간 그 의무를 벗어날 길은 없다.

이 의무가 ‘도덕적’이라는 말은 돌봄이 양심의 문제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약 보호자가 돌봄을 더는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시설에라도 맡기게 되면, 마치 가족을 사람이 살지 못할 곳에 버리고 오는 듯한 마음의 가책에 시달리게 된다.

무엇보다 보호자의 존재는 돌봄을 보호자-의존하는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고립된 행위로 만든다. 주된 보호자가 있다는 사실은 다른 이들에겐 돌봄 의무가 없다는 논리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돌봄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고라도 생기면 그 책임은 보호자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 여기에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은 돌봄을 더 고립된 일로 만든다.

만약 돌봄을 수행하는 이들이 빈곤하거나 교육 수준이 낮다면 돌봄 자체가 더 심한 고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 빈곤은 생계 그 자체를 위협할 뿐 아니라 작은 이동권조차 제한한다. 게다가 빈곤과 교육 수준은 필요한 정보의 부재로 이어진다. 앞선 사건의 아버지가 장애인 지원활동사업의 존재를 알게 된 시기는 교통사고를 겪고 난 2021년이었지만, 관련된 활동보조서비스 사업이 시작된 건 2007년이다. 40년 동안 아들을 돌보면서도 이런 지원사업의 존재를 몰랐던 게다.

장애, 질병, 노화와 같이 인간이 살면서 당연히 겪거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함께 돌아보아야 할 공통의 몫이라 볼 수는 없는 걸까? 그 일을 사회가 담당할 몫이라 한다면 흔히 말하는 ‘민폐’가 되는 걸까?

아쉽게도 우리는 ‘삶이 힘들다’고 탄식하면서도, 그 삶을 더욱 힘겹게 만드는 장애, 질병, 노화가 당장 나의 일이 아니라면 외면하는 듯하다. 너의 고통은 네가 알아서, 민폐가 되지 않게, 보이지 않게 돌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더하여 보호자라는 명분으로 그들에게 돌봄의 무게를 온전히 지운 채 방관하거나 최소한의 보조만 할 뿐이다. 이렇게 고립된 돌봄은 돌봄이 필요한 사람뿐만 아니라 돌보는 사람마저 병들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선 사회가 돌봄 살인의 공범이다.

김만권 정치철학자

김만권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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