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전 한복’ 개선하겠다고?···국가유산청장이 불 붙인 ‘한복대여 논란’

전지현 기자 2024. 5. 19.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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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이 “경복궁 근처 ‘국적 불명 한복’ 개선할 것”이라고 말한 가운데 19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을 찾은 관광객들이 한복을 입고 관광을 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말레이시아에서 서울 여행을 온 페이쉔 간(26)은 19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을 찾았다. 그는 친구와 함께 한복 대여점에서 마음에 드는 흰색 저고리와 연노란색 치마를 빌렸다. 페이쉔이 고른 치마는 퓨전 한복으로, 꽃 자수 레이스가 한 겹 덧씌워져 있었다. “색 조합이 예뻐 골랐다”는 그는 “더운 말레이시아 날씨에선 입기 어려운 옷이라 더 특별하다. 한국 문화를 경험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하며 웃었다.

경복궁 앞은 이처럼 형형색색의 한복을 입은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드레스 형태로 금박과 레이스가 달린 치마를 쉽게 볼 수 있다. 역할놀이를 하듯 조선시대 왕이 입던 곤룡포, 선비의 두루마기, 사또 복장을 택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이제 이런 한복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국가유산청(문화재청 전신)이 ‘전통한복’을 기준으로 경복궁 일대 한복점에 개선 작업을 추진할 것으로 보이면서다. 17일 새로 취임한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이 최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국가유산청이 앞장서서 우리 고유의 한복에 대한 개념을 바로잡고 개선할 때”라고 의지를 내비쳤다. 최 청장은 관광객들이 입는 한복에 대해 “실제 한복 구조와 맞지 않거나 ‘국적 불명’인 경우가 많다”며 “주변 한복점 현황을 조사 중”이라고 했다. 한복 착용자는 고궁 관람이 무료인데, 해당 혜택도 재검토할 뜻을 시사하기도 했다.

“예쁘기만 한데…퓨전 한복은 한복 아닌가요?”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이 “경복궁 근처 ‘국적 불명 한복’ 개선할 것”이라고 말한 가운데 19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 근처 한복 대여점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복을 입고 있다. 정효진 기자

이날 경복궁 일대에서 만난 한복 대여점 상인들은 최 청장의 구상에 “취지에는 공감하나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복 대여점 사장 A씨(61)는 관광객 중 열에 아홉은 퓨전 한복을 찾는다고 했다. 그는 “관광객들은 사진을 남기려고 한복을 빌리는 것이라서 반짝이는 소재가 달린 화사한 치마가 인기”라고 말했다. 다림질 등 관리가 더 까다로운 전통 한복은 대여 단가가 퓨전 한복보다 1만~1만5000원쯤 높게 책정돼 있기도 하다. A씨는 “전통 한복을 더 추천하고 싶어도 가격이 높아 무작정 강요할 수도 없다”고 했다.

한복 트렌드 변화를 자연스러운 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또 다른 업체 사장 B씨(33)는 “뉴진스·블랙핑크가 화보 촬영 때 입은 개량·생활 한복을 보고 찾아오는 손님도,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보고 그 시대 의복이 있는지 물어보는 손님도 있다”며 “‘전통’을 어떻게 정의할지도 모호한 것 같다”고 했다.

이 같은 ‘퓨전 한복’ 논란은 2018년에도 김영종 당시 종로구청장이 ‘퓨전한복 고궁무료입장 혜택 폐지’를 주장하며 불거졌다. 같은 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당시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한복을 입고 오는 분들께 무료입장이라는 혜택을 드리는 것뿐”이라며 “제 개인 생각은 한복의 다양성을 존중해주자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 [2018국감] ‘한복 국감’ 김수민 의원 “3만원에 빌린 이 개량한복, 청장님 보시기엔 어떠신지요”
     https://www.khan.co.kr/politics/politics-general/article/201810161440001?utm_source=urlCopy&utm_medium=social&utm_campaign=sharing

시민들의 생각은 최 청장의 말과는 달랐다. 고궁 주변 한복 대여의 핵심은 ‘한복을 입어보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걸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경복궁 인근에 사는 이승화씨(28)는 “지나치게 일본·중국풍으로 형태를 벗어난 한복을 보진 못했다”며 “오히려 퓨전 한복이 유행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한복을 입어보게 됐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중학생 아들 두 명과 경복궁을 찾은 송모씨(43)는 “전통이 같이 가면 좋겠지만 규격화가 가능할까 싶다”며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즐거운 체험 속에서 ‘이런 형태의 옷이 한국의 전통 의복이구나’ 알리는 건 지금도 충분히 이뤄지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19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을 찾은 데이비드양(37)이 곤룡포를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의 부인 신디 모아(40)는 대여점에서 퓨전 한복을 선택했다. 전지현 기자

놀이문화처럼 자리잡은 한복 입기 체험에 지나친 엄숙주의를 드리우는 건 지양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B씨는 “두루마기는 입는데 한복 바지를 입지 않는다거나 곤룡포에 선비 갓을 쓰는 등 큰 틀이 흔들리는 것은 지양해야겠지만, 디자인적 요소는 패션 트렌드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이날 경복궁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은 세세한 한복의 생김새보다 경험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모습이었다. 미국에서 여행 온 데이비드 양(37)은 곤룡포가 ‘왕의 옷’이라는 것을 듣고 주저 없이 이를 선택했다. 면류관까지 챙겨 쓴 그는 “왕이 된 기분!”이라며 즐거워했다.

그의 부인 신디 모아(40)는 화려한 검정 저고리에 빨강 치마 조합의 개량한복을 택했다. 이들은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가 되지만 각자 개성을 추구하는 사회라 이미 퍼진 문화를 거둬들이긴 어렵지 않을까”라며 “어찌 됐든 우리는 한국 문화 체험을 해서 즐거웠다”고 말했다.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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