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차마' 그 마음으로 환자 곁으로

김기철 기자(kimin@mk.co.kr) 2024. 5. 19.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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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9일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한국외대 강당에는 '임시 진료소'가 차려졌다.

치료감호소에서 만난 환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나의 무섭고 애처로운 환자들'에서 차승민은 "치료가 우선이다. 자신이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 그리고 그 병으로 인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명확히 인식하고 난 다음에야 참회와 반성, 처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 범죄자들을 왜 국가가 돈을 들여 치료를 해주느냐"는 비판을 종종 듣지만 차승민에게는 그저 한 명의 환자일 뿐이고 환자이기에 의사로서 치료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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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배자·노숙인 돌본 배기영
차승민 치료감호소 의사처럼
환자 지키는 의사들이 버팀목
이제는 환자 곁에 돌아오고
정부와 적극 협상 나설 차례

2003년 3월 9일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한국외대 강당에는 '임시 진료소'가 차려졌다. 50여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행색이 초라했고 눈빛은 불안했다. 이 젊은이들은 당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소속의 20대 수배자들이었다. 짧게는 2년, 길게는 7년 넘게 숨어다녀야 했기에 건강 문제가 심각했다. 이를 전해 들은 몇몇 의사가 임시 진료소를 차리고 치료에 나섰다. 이날 경찰은 한국외대 주변에 100여 명의 경력을 배치했지만 수배자들이 교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지도, 연행하지도 않았다. 비록 수배자들이었지만 '환자와 의사'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준 것이다.

이날 학생들을 진료한 의사들 중에 배기영이 있었다. 배기영은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의사였다. 그는 진료실에서 보낸 시간보다 거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매주 금요일에는 서울역 앞에 간이 진료소를 차리고 노숙자들을 치료했고, 주말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돌봤다. 혼자 사는 어르신을 치료하기 위해 쪽방촌을 찾아다니는 날도 많았고 고문 피해자와 장기 파업 중인 노동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도 백방으로 뛰었다. 살펴야 할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배기영에게는 진료실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돌보다 정작 본인은 건강을 잃어 2015년 세상을 떠난 배기영은 생전에 "왜 아버지는 맨날 다른 사람을 돌보러만 다니냐"는 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빠 이름 '배기영'을 빨리 발음해보면 '배경'이 돼. 아빠는 세상의 배경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그랬다. 배기영은 늘 환자 곁에 있었지만 결코 드러나지 않는 배경 같은 의사였다.

차승민은 국립법무병원, 보통 치료감호소로 불리는 곳에서 일하는 정신과 의사다. 그러니까 그가 진료하는 환자는 모두 범죄자들이다. 그의 환자 중에는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의 살인범 김성수 같은 극악무도한 범죄자들도 있다. 치료감호소에서 만난 환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나의 무섭고 애처로운 환자들'에서 차승민은 "치료가 우선이다. 자신이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 그리고 그 병으로 인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명확히 인식하고 난 다음에야 참회와 반성, 처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 범죄자들을 왜 국가가 돈을 들여 치료를 해주느냐"는 비판을 종종 듣지만 차승민에게는 그저 한 명의 환자일 뿐이고 환자이기에 의사로서 치료할 뿐이다.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에 반발해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면서 시작된 의료대란이 3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환자들의 수술이 미뤄지고 대학병원에 적자가 쌓이는 등 점점 한계 상황을 향해 가고 있지만 진료 중단 사태는 발생하지 않고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 병원이 이렇게라도 유지되는 것은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긴급 지원 때문도 아니고 환자들이 알아서 병원을 찾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비록 정부 정책에 반대를 하지만 차마 환자를 외면할 수 없는 의사들이 버텨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일 전국 51개 대학병원의 교수들이 명목상 '집단 휴진일'로 선언했지만 이날도 사실상 대부분의 의대 교수들은 진료실을 지켰다. 의대 증원에 반발해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이미 진료 예약이 된 환자들과 수술이 잡혀 있는 환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법원이 의대 증원 집행정지 가처분 항고심에서 각하와 기각 결정을 하면서 의료계가 올 입시에서 의대 증원을 막을 방법은 없어졌다. 사직과 휴진을 고집한다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의사들만 더욱 고립될 뿐이다. 의사들은 환자 곁으로 돌아오고 의사단체는 정부와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방법밖에 없다. 물론 정부도 의사들이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줘야 한다.

[김기철 과학기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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