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는 게 자랑이다”…금주령 개의치 않는 공무원들, 만취해 왕에게 ‘너’라고 부르기도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5. 19.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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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람들의 못말리는 술사랑
건국때부터 금주법 유지했지만
유교문화 탓 종종 예외 허용돼
임금부터 관원들까지 음주 즐겨
기생과 술마시는 남자(20세기초). 조선후기 경제의 안정화로 술소비가 급증했다. [미국 헌팅턴도서관(잭 런던 기증사진)]
“듣자하니, 요즘 민간에 술집이 너무 많아 10가구 중에 7~8가구 정도이고, 양반 집에서도 술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 경우가 많으며, 그중에 많이 빚는 경우는 거의 100여 섬(石)이 넘는다고 합니다.(而聞近來閭巷酒家太多, 十居七八, 而兩班家, 亦多賣酒爲業, 其中多釀者, 幾過百餘石云.)”

<승정원일기> 1728년(영조 4) 음력(이하 음력) 7월 13일 기사에서 형조판서 서명균(1680~1745)이 시중의 곡식낭비 실태를 지적하며 영조에게 이처럼 아뢨다. 술집 한 곳에서 100섬(1石=144㎏), 즉 14t이 넘는 엄청난 양의 술을 제조했다는 것이다. 당시 한양에서 양조산업이 크게 번성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다보니 양반들도 체면불사하고 경쟁적으로 술을 만들어 팔았다.

이에 따라 영조는 폭증하는 술소비를 억제하기 위해 역대 가장 강력한 금주령을 실시한다. 하지만 그때 뿐이었다. “근래 도성 안에는 큰 양조장이 골목에 차고 작은 술집이 처마를 잇대어 온 나라가 미친 듯이 술 마시는 것만 일삼고 있습니다.(近來城市之間, 大釀彌巷, 小酷連屋, 擧國若狂, 專事銜杯.)”

<정조실록> 1790년(정조 14) 4월 26일 기사에서 대사간 홍병성이 정조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영조의 고강도 금주령이 무색하게도 정조시대에 오면 도성의 골목마다 크고 작은 양조장이 빽빽하게 들어찼고, 도성 백성들이 술에 미쳐 있다는 언급이 나올 정도로 양조산업이 오히려 크게 번성했던 것이다.

조선후기 경제사정 좋아지며 양조산업 크게 번성···양반들도 체면불사하고 술장사 나서
기생집에서 술마시는 햔량들(일제강점기). [국립민속박물관]
술마시는 남자들(일제강점기). [국립민속박물관]
우리 민족 하면 술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힘들다.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술 마시는 풍조가 만연했다. 술에 관대한 유교를 국교로 삼은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논어>는 공자의 음주습관에 대해 “술의 량을 헤아릴 수 없으나 어지러운데 이르지 않았다”고 기술한다. 취하지만 않는다면 술을 얼마든지 마시든 아무 문제없다는 의미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음주를 금기시하지만 유독 유교에서만은 예외인 것이다. 사실, 유교에서는 술은 숭고한 음식이며 백성을 교화하는 수단으로까지 인식됐다. 유교에는 향음주례(鄕飮酒禮)라는 독특한 의식이 있다. 향촌의 지방관 또는 유생들이 학덕과 연륜이 높은 노인을 주빈으로 모시고 베푸는 잔치다. 이를 통해 존현양로(尊賢養老·어른 존중, 노인 봉양)와 효제충신(孝悌忠信·효도, 우애, 충성, 신의)의 유교덕목을 훈련한다. 오늘날 술은 어른한테서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여기서 기원한다. 조선은 유교 통치이념 및 사회질서 구현과 지방통제 수단으로서 향음주례를 적극 권장하면서 술을 숭상하는 숭음(崇飮) 풍조가 확산됐다.

아무리 그렇기로 농경시대에 부족한 식량을 술로 탕진한다는 것은 옳지않다. 특히 음주는 개인의 건강을 해치고 폭력, 가산탕진 등의 폐해도 적지않다. 따라서 조선은 건국 초부터 금주법을 유지했고, 가뭄이나 홍수 등 재해가 닥쳤을 때는 단속의 강도를 높였다. 하지만 제사와 각종 잔치, 손님접대 등 유교의례에 쓰는 술을 예외로 허용하며 금주령을 무력화시켰다.

술에 관대한 유교 영향으로 ‘숭음풍조’ 확산, 금주령 때도 제사·잔치·접대 등 유교의례 예외 허용
기생과 술마시는 남자(일제강점기). [미국 헌팅턴 도서관(잭 런던 기증 사진)]
술항아리 나르는 남자(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임금부터 금주령을 우습게 알았다. 대궐에서는 5일마다 새벽에 문무백관이 정전에 모여 왕에게 문안을 올리고 정사를 논의하는 조회를 열었다. 조회를 마치면 임금은 참석한 관료들과 술자리를 함께 했다. <태조실록> 1398년(태조 7) 윤 5월 26일 기사는 “일출 전 임금이 궐내 누각에서 좌정승, 우정승과 봉화백 정도전, 의성군 남은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고 모두 취하였다. 임금이 술에 취하여 이내 건국한 일과 최운해를 방면한 그릇된 일을 논하였다”고 했다. 사관이 태조(1335~1408·재위 1392~1398)가 취중에 말실수를 했다고 기술한 것이다.

태종 이방원(1367~1422·재위 1400∼1418)은 형제 중 유일하게 과거에 합격했다. 젊은 시절 자신이 재학했던 성균관을 각별하게 여겼고 후배들에게 어주를 자주 내렸다. 1417년(태종 17) 9월 9일 어육과 함께 어주 100병을 지급했다. 1418년 8월 3일에도 술 50병과 말린 노루와 사슴 고기 각각 5구(口)씩을 성균관에 하사했다. 태종은 그러면서 “내가 젊었을 때 성균관에 있었는데 술을 마시면 반드시 노래하고 춤추어 흥을 돋구었다. 이제 이것을 마시는 유생들도 마땅히 그렇게 하라”고 했다.

주색에서는 조선임금 중 연산군(1476~1506·재위 1494~1506)을 따라올 이가 없다. 1503년(연산군 9) 11월 21일 밤에 임금이 영의정 성준(1436~1504), 좌의정 이극균(1437~1504) 등 신하들과 편전에서 술자리를 가졌다. 술이 오른 연산군이 성준에게 호피와 어의를 선물로 줬다. 이극균에게도 어의를 입혔고 만취한 이극균이 그만 어의에 구토를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극균은 다음날 입궐해 임금에게 용서를 빌었다. 11월 22일 실록에 의하면, 이극균은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했다. 연산군은 “어제 과음해서 취한 뒤의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라고 무마했다. 성준과 이극균은 그러나 이듬해 갑자사화(연산군 생모 윤 씨 복위 문제가 발단이 돼 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 때 처형됐다.

83세까지 장수한 영조 의외로 애주가···‘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세종대왕은 음주 극혐
신윤복 필 풍속도화첩 중 유곽쟁웅(국보). 술은 귀중한 식량을 낭비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건강을 해치게 하고 폭력과 살인까지 초래하는 등 폐해가 적지않다. [간송미술관]
작자 미상 풍속화(조선시대). 술취한 남자들이 기생집에서 싸우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83세까지 장수한 영조(1694~1776·재위 1724~1776)는 의외로 애주가였다. 신하들이 절주를 요청했지만 영조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영조실록> 1736년(영조 12) 4월 24일 기사에 따르면, 경희궁 흥정당에서 야대(夜對·야간 경연)를 마치고 술을 마셨다. 검토관(경연청 정6품 관직) 조명겸이 “항간에 성상께서 술을 끊을 수 없다는 말이 떠돈다고 하니 조심하고 염려하여 경계함을 보존토록 하소서”라고 했다. 영조는 “목을 마를 때 간혹 마시는 오미자차를 남들이 소주인줄 의심한다”고 했다.

반면, 세종대왕(1397~1450·재위 1418~1450)은 술을 혐오했다. 1422년(세종 4) 5월 10일 태종이 승하한다. 의정부와 육조 대신들은 건강을 해칠 수 있다며 찬과 술을 들 것을 강권했다. 5월 26일 실록에 의하면, 정부와 육조가 다시 청하기를 “전하께서 비록 술을 자신들 대효(大孝)에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종묘와 사직을 위하여 억지로라도 한 잔 들어 성체를 보호하소서”라고 하자 세종은 “나의 성품이 술을 좋아하지 아니하니 마시지 않는 것이 도리어 편하다. 대신이 재삼 청하니, 힘써 그 말을 따르겠다”며 소주를 올리라 했지만 반잔쯤 마시고 중단했다.

조선시대 독특한 음주문화 중 하나는 관리들이 업무시간에 차나 커피처럼 술을 마셨다는 점이다.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관리들의 상습적 음주행태를 비판하며 “관청에 있는 자는 조반(早飯·아침 먹기 전에 드는 식사), 조반(朝飯), 주반(晝飯)을 먹으며 술은 때를 가리지 않고 먹는다. … 술이 깨어 있는 날이 없으니 이렇게 하여 병을 얻어 폐인이 되는 사람도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모든 관아에서 음주는 일상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관리를 탄핵하던 사간원이 심했다. 업무가 과중하지 않아 음주를 업으로 삼았다. 서거정(1420~1488)의 <필원잡기>에 따르면, 사간원은 새벽부터 술을 마셨다. 숙직한 관원이 일어나기 무섭게 잡무 보는 서리들이 아침인사를 하면서 술상을 올린다. 안주는 약과였고 잔이 거위 알처럼 컸다. 관원들이 모두 출근한 후에도 과일상을 차려놓고 종일 술을 마셔댔다. 사간원은 금주령을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이를 오히려 큰 자랑으로 삼았다.

관리들은 업무시간에 커피처럼 음주 관행화, 임금의 최측근 승지와 내시도 술 취해 물의
김홍도 필 풍속도화첩 중 주막(보물). [국립중앙박물관]
임금과 학문을 강론하고 국정을 협의하던 경연 자리에 임금의 비서인 승지가 만취 상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1790년(정조 14) 11월 12일 실록에 따르면, 승지 신기가 술이 몹시 취한 상태로 경연에 들었다. 정조는 “면전에서 글을 받아쓸 때 술 냄새가 코를 찌르니 너무도 조심성이 없다. … 무엄하게도 어찌 이처럼 과음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화를 냈다. 임금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던 내시들도 술에 취해 지냈다. 1497년(연산군 3) 6월 2일 실록에 의하면, 환관 박인손은 연산군의 심부름을 갔다가 술에 취해 밤이 되도록 임금에게 결과를 아뢰지도 않은 채 바로 귀가해 버렸다. 박인손은 두달 뒤에도 임금이 준 술을 갖고 정승 노사신의 집에 갔다가 만취했다. 다음날에도 술이 깨지 않아 연산군에게 보고하면서 횡설수설했다. 연산군은 “내관들은 술을 취하게 마시지 않는 것이 법이다. 국문하도록 하라”고 했다.

새로 부임하는 관원을 맞는 환영연, 동료가 떠날 때 여는 전별연은 유별나게 극성스러웠다. 1434년(세종 16) 7월 26일, 나라에 수재가 발생하자 전별을 핑계로 관리들이 술 마시는 것을 금지했다.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8월 2일 임금의 최측근인 승지들이 전별을 빙자해 기생을 끼고 술을 마셔 물의를 빚었다. 실록에 따르면, 좌승지 권맹손, 좌부승지 정갑손, 우부승지 윤형, 동부승지 황치신이 밤에 주자소(활자 주조 관청)에서 기생을 데리고 음주를 한데 이어 상중인 사약(司鑰·궁궐 자물쇠를 관리하던 잡직)의 집에서도 각도 감사를 전별한다며 술을 마신 일이 사헌부에 적발됐다. 사흘 뒤인 8월 5일에도 전 판서, 참찬 등 고위직들이 함께 모여 전별을 하며 술판을 벌인 사실이 드러났다.

자기관리가 철저할 것 같은 대학자 중에서도 술주정으로 오명을 남긴 인물이 적지않다. 세조의 남자 정인지(1396~1478)는 술에 취해 임금 면전에서 여러차례 치명적 실수를 해 곤욕을 치렀다. 술만 취하면 임금을 무시하거나, 임금의 발언에 반기를 들기 일쑤였다. 1458년(세조 4) 9월 15일 정인지가 만취해 임금에게 ‘너’라고 부르는 참담한 불경죄를 저질렀다. 9월 17일자 실록에 의하면, 의정부·육조와 충훈부가 정인지의 죄를 청했고, 영중추원사 이계전은 격분해 “베어 죽여야 한다”고 했다. 세조는 “오랜 벗의 정을 잊지 못하고 한말로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라고 감쌌다.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1536~1594)도 술주정이 심해 비판받았다. 정철은 새로운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사헌부가 그의 주사가 심해 부적격하다고 반대했다. 실록에 의하면, 사헌부는 1582년(선조 15) 9월 13일 정철이 도승지에 제수되자 “술주정이 심하고 미친 사람처럼 망령되다”고 탄핵했고, 이어 1583년(선조 15) 4월 1일 예조판서에 발탁되자 이번에도 “술을 좋아하고 실성하였다”며 불가를 외쳤다.

18세기 이후 사회가 안정화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술소비도 가파르게 증가한다. <승정원일기> 1725년(영조 1) 9월 24일 기사에서 전 만호 이태배는 “도성 안과 근기(서울 근처의 경기지역)의 백성들은 누더기를 입고 구걸하러 다닐지라도 취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고 했다. 구걸하는 거지들까지 술에 쩔어 살았다는 것이다.

엄격한 금주령 시행했지만 효과 거의 없고 단속 아전들 횡포로 힘없는 백성들만 피해
신윤복 필 풍속도화첩 중 주사거배(국보). [간송미술관]
술을 즐겼던 영조 때 엄격한 금주령이 집행된 것도 이같은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영조는 국법을 어긴 종2품 절도사를 참형에 처했다. <영조실록> 1762년(영조 38) 9월 5일과 17일 기사에 따르면, 대사헌 남태회가 “남병사(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윤구연이 멋대로 술을 빚어 매일 취한다. 파직해야하다”고 고했다. 영조는 “파직으로 되겠냐”라며 윤구연을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윤구연의 집에서 술 냄새가 나는 빈항아리가 나오자 분노한 영조는 친히 숭례문에 나아가 윤구연을 참했다. 무분별한 금주령은 단속 아전들만 배을 불렸다. 1752년(영조 28) 12월 20일 실록은 “금주를 내린 뒤로 술집이라는 이름만 붙어 있으면 형조와 한성부의 아전들이 별도로 금란방(禁亂房·단속반)을 설치하여 날마다 돈을 징수하고 있다. 기타 속전(贖錢·벌금)을 남용하는 폐단은 이루 다 낱낱이 들기가 어렵다”고 했다.

정조는 지나친 금주령에 부정적이었다. <정조실록> 1792년(정조 16) 9월 5일 기사에 따르면, 가을철에 치솟는 쌀값 안정을 위해 양조장을 금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정조는 “명령만 내리고 일정 금지시키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신중하는 편이 낫다”며 “(명령부터 내려) 어찌 먼저 백성들을 동요시키려고 하는가”라고 질책했다.

지키지도 못할 법은 범법자만 양산할 뿐이라는 정조의 혜안이 새삼 돋보인다. 술도 적당량 마시면 약이라고들 한다. 그렇지만 매사가 그렇듯 정당한 선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용재총화(성현), 필원잡기(서거정)

2. 조선왕들, 금주령을 내리다. 정구선. 팬덤북스. 2014

3. 향음주례와 금주령을 통해 본 조선시대 술문화 연구. 엄현상. 동양대. 2020

4. 술, 예술의 혼. 장혜영. 어문학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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