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자 신문 예행연습 같았던 윤 대통령 회견 [아침햇발]
손원제 | 논설위원
지난 9일 열린 윤석열 대통령의 기자회견에서 가장 기괴했던 대목을 꼽으라면 이거다. “순직한 사고 소식을 듣고 저도 국방 장관에게 이렇게 좀 질책을 했습니다. (…) 왜 이렇게 무리하게 진행을 해서 이런 인명 사고가 나게 하느냐, (…) 이렇게 좀 질책성 당부를 한 바 있습니다.” 이런 답변을 윤 대통령이 1분19초나 이어간 그 장면이다.
질문과 동떨어진 ‘동문서답’을 장황하게 풀며, 문맥과 의미 자체를 파괴하고 있어 기괴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애초 기자 질문은 이랬다. “이 사건 같은 경우에는 대통령실 외압 의혹과 대통령님께서 국방부 수사 결과에 대해서 질책을 했다는 의혹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입장 부탁드리겠습니다.”
명확하게 ‘수사 결과에 대해서 질책’이라고 물었다. ‘브이아이피(VIP) 격노설’에 대한 질문임을 유치원생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이 해병대 1사단장의 과실치사 혐의를 적시한 해병대수사단의 수사 결과에 격노해 국방부 장관을 연결하라고 한 뒤 ‘이런 일로 사단장을 처벌하게 되면 누가 사단장을 할 수 있겠냐’라고 질책했다는 의혹 말이다. 그런데 사법시험에 붙고 검사를 26년이나 한 윤 대통령은 ‘무리한 구조 작업에 대해 질책을 했다’며 엉뚱한 답을 했다. 자기 자신이 관련된 문제이고, 여러 매체에서 무수히 다룬 사안이다. 잦은 음주의 부작용 아니냐는 말이 나오지만, 웃자고 하는 얘기일 것이다. 결국 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 못 알아들은 척 딴소리를 한 것임을 어느 누가 모르겠나.
윤 대통령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또한 모를 사람이 없다. 애초 질문 맥락에 맞는 대답을 하는 순간 윤 대통령은 자신이 받는 범죄 의혹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공개 진술을 남기는 셈이 된다. 수사 결과에 대해 질책한 게 사실이라고 답하면, 온 국민이 보는 가운데 의혹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반대로 수사 결과에 대해 질책한 일이 없다고 딱 부러지게 부인할 수도 없다. 나중에 관련 물증이나 증언이 나오기라도 하면 더 큰 책임을 져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 질문 의도에 부합하는 답을 하는 것은 벗어나기 힘든 딜레마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물론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윤 대통령도 분명하게 ‘수사 결과에 대해 격노하고 질책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을 것이다. 잘못한 게 없다면, 모처럼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의혹을 말끔히 털고 가는 게 인지상정이다. 부인하는 대신 딴말만 실컷 늘어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으로 수사 결과에 대한 윤 대통령의 격노와 질책이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에 무게를 싣는다. 이렇게 보는 게 상식적이다.
만약 이런 추론처럼 해병대 수사 결과에 격노한 윤 대통령이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을 질책한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될까? 군사법원법과 군사경찰직무법은 직속 지휘관도 수사기관의 수사에 개입할 수 없도록 엄격히 금지한다. 몇 단계 떨어진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다.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에게, 국방부 장관은 해병대 사령관에게 부당하게 ‘의무 없는 일’을 하도록 시킨 직권남용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검사 시절 직권남용으로 수많은 과거 정부 인사들을 기소했던 윤 대통령이 이를 모를 리 없다.
나아가 이 정도 중대 불법행위는 ‘빼박’ 탄핵 사유가 된다. 더구나 장병 사망은 젊은 세대와 부모 세대 모두 크게 아파하고 공분하는 사안이다. 윤 대통령이 사단장 혐의를 빼라고 질책하고 그런 수사 결과를 낸 해병대수사단장을 오히려 항명죄로 처벌하도록 밀어붙였다면, 국민들 또한 이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 윤 대통령에 대한 최후의 기대를 접고 지지를 전면 철회할 가능성이 크다. 이 또한 윤 대통령은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신문할 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피의자들이 자주 쓰는 방법이 묵비권 행사다. 이번에는 1년9개월 만에 기자회견을 연 마당에, 질문에 대놓고 묵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빙빙 말을 돌리며 내용상 묵비권을 행사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의 기괴했던 1분19초 답변은 윤 대통령의 피의자 신문 예행연습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그러나 이후 진짜 수사가 시작된다면, 이번 회견처럼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이 점 역시 윤 대통령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기를 쓰고 특검법 거부권 행사에 나서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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