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돈내산 샤넬백 낡아서 고치면 불법이라니”...가방성형 장인의 물거품된 꿈 [신기자 톡톡]

신수현 기자(soo1@mk.co.kr) 2024. 5. 19.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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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자 톡톡-10]
가방에 ‘새 생명’ 불어넣는 장인
김태욱 서울가방연구소 대표
김태욱 서울가방연구소 대표가 그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신수현 기자>
“내 돈 내고 내가 정당하게 구입한 가방이면 내 소유 아닌가요? 명품 가방이 낡았거나 디자인 등이 마음에 안 들어서 뜯어 고치면(리폼, reform)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이 됩니다. 세상에 어떤 물건이 이런가요? 우리나라 명품 시장은 매우 커졌지만,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명품 업체들한테 소위 ‘갑질’을 당하고 있어요.”<김태욱 서울가방연구소 대표>

회계감사 서비스를 비롯해 조세·재무·경영 컨설팅 등 기업 경영 전반에 걸친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삼정KPMG에 의하면 한국 명품 시장 규모는 2021년 58억달러(약 7조9000억원)에 이를 만큼 급격히 커졌다. 명품 중에서도 우리나라는 특히 여성 가방 수요가 많다. 우리나라의 웬만한 성인 여성들이라면 명품 가방 1개는 갖고 있거나 갖길 원할 정도로 명품 가방 수요가 증가하면서 명품 가방 리폼 수요 역시 확 늘었다.

명품 가방 리폼 산업도 조금씩 커지고 있었지만 지난해 말 관련 산업에 제동이 걸렸다. 지난해 우리나라 법원(서울중앙지방법원)이 루이비통 가방을 리폼한 행위가 상표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우리나라에서 소비자가 합당하게 구입한 루이비통 가방·지갑 등의 디자인을 획기적으로 리폼하면 불법이라는 의미다. 단순 수선(AS)은 가능하다. 수백만원 혹은 수천만원을 주고 구입한 내 소유물인데 함부로 고칠 수도 없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의 가방 리폼 시장에서 1위를 달리는 ‘서울가방연구소’의 김태욱 대표는 “이 판결로 인해 모든 꿈을 잃었다”며 “미국은 명품 리폼 시장 규모가 수십조원에 달하고, 소비자들이 자신의 가방을 마음대로 고칠 수 있다. 가장 큰 피해는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입게 된다”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서울가방연구소는 우리나라 명품 가방 리폼 업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바로 쓰레기통에 넣어야 할 정도로 닳고 낡은 가방, 촌스러운 가방도 김 대표나 서울가방연구소 장인들의 손길을 거치면 세련되고 깔끔한 새 가방으로 태어났다. 가방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 성형한 것처럼 변신했다.

김 대표를 비롯해 장인들이 가방 뼈대부터 하나하나 다 고치기 때문에 고객이 1개의 가방 수선을 의뢰하면 완제품을 받는 데까지 8주~10주 소요되지만, 의뢰가 끊임없이 계속 들어왔다. 한 달에 약 450개~500개 가방을 리폼했다. 하지만 법원 판결로 이 모든 것들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돼버린 것이다.

김 대표는 “우리나라에서는 명품을 수선하려고 해당 업체에 제품을 맡기면 수선 대신 새 제품 구입을 권유하거나 어쩌다 수선해줘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현실”이라며 “웬만한 중고차 값에 달하는 새 제품을 판매하면서 제대로 된 사후 관리(AS)도 안 해주는 업체가 명품 업체 말고 어디에 있냐”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소비자들의 이러한 불편함을 해결해주기 위해 리폼 업체들이 있는 건데, 명품 업체들의 훼방으로 이제는 리폼 대신 단순 수선에 집중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가방 제작에 청춘 바쳐…“가방은 곧 내 자신”
1980년 김 대표는 가방 제작 업계에 뛰어들었다. 기술을 안 가르쳐 주려는 기술자들에게 매를 맞아가면서 힘겹게 배웠다. 빨리 기술을 배우기 위해 남들보다 2시간 먼저 출근해서 연습했고, 다른 사람들이 퇴근한 후에도 집에 가지 않고 남아서 혼자 연습 또 연습했다. 2년 안에 웬만한 기술을 모조리 익히겠다고 결심하고 이를 악 물었다.

김 대표는 “예전에는 가방을 생산할 때 재단, 봉제, 조립 등 분야를 나눠놓고 해당 분야에서만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이 모든 과정을 익혀서 혼자 제품을 통째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업체를 옮겨 다니며 모든 과정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몇 년 후 가방, 지갑, 모자, 벨트 등 가죽으로 만들 수 있는 대부분의 제품을 설계부터 완제품 생산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습득했다. 이후 김 대표는 삼성전자의 휴대폰 가죽 케이스(휴대폰 겉에 씌우는 일종의 휴대폰 액세서리) 생산 기업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삼성전자 휴대폰의 맞춤 케이스를 제작했다.

몇 년 후 유명 브랜드의 가방을 외주 생산(OEM)하는 기업으로 옮겼다. 그 기업의 베트남 공장에서 해외 유명 브랜드의 가방을 생산했다. 그의 성실함과 기술력을 알아본 여러 가방 OEM 업체들이 그에게 해외 공장을 맡기고 싶어 했다. 한국의 가방 OEM 업체들이 인건비 절감 등을 위해 해외에 공장을 설립해서 운영하는데, 김 대표가 이런 기업이 해외에 공장을 설립하는 프로젝트를 주도하기도 했다.

해외 생활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10년 넘게 해외에 살다보니 고국이 그리워졌다. 2018년 한국으로 왔다. 가방을 전문적으로 외주 생산하는 기업을 설립한 후 키워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한국에서 기술자를 구하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공장을 설립할 큰돈도 없었다. 정보기술(IT)을 이용해 가방을 정확하게 설계하기 위해 캐드 기술을 배웠다. 고민 끝에 2019년 서울가방연구소를 설립한 후 가방 리폼 사업을 시작했다. 고객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김 대표는 “리폼 기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리폼 기술을 공짜로 가르쳐주면서 인력을 양성하고 있었다”며 “이렇게 키운 기술자들에게 별도로 리폼 매장을 내주는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었는데, 명품 업체들의 횡포로 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일이 힘들지만, 제품을 받아본 고객들이 만족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어머니 등 가족의 유품 리폼을 의뢰하는 고객들도 있다.

김 대표는 “가족 유품이라서 자신에게는 정말 소중한 가방이지만, 너무 낡아서 고쳐줄 수 있다는 곳이 없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서울가방연구소에 문의한 건데, 꼭 고쳐 달라며 간곡하게 부탁한 고객이 있었다”며 “해당 가방과 같은 색상·질감의 소가죽을 겨우 구해 힘겹게 리폼한 적도 있다”고 설명했다.

일을 하면서 겪는 가장 힘든 점은 고객들이 고쳐달라며 보내오는 가방 중에 가품이 약 30%에 달할 만큼 많다는 점을 꼽았다. 소위 말하는 짝퉁 가방이다.

김 대표는 “고객이 해당 가방을 선물 받았을 수 있기 때문에 고객에게 짝퉁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데다 짝퉁은 가방 부품·소재 등 품질이 형편없어서 가방의 원재료를 거의 활용할 수 없다”며 “이런 가방을 고치면 우리가 손해 보는 구조”라고 토로했다.

가방 수선 일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도 이어졌다.

“디자인, 패션 등을 공부 중이거나 관련 학과를 졸업한 청년들이 가방 만드는 일을 배우고 싶다고 찾아옵니다. 하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대부분 포기합니다. 어떤 기술이든 하루아침에 뚝딱 익힐 수는 없어요. 가장 필요한 덕목은 끈기, 고집입니다. 내가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묵묵히 끈기 있게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어떤 일이든 쉽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없어요. 포기하지 않는 정신과 자세가 뒷받침돼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신수현 기자

* 신기자 톡톡은 화제의 인물, 특정 분야에 성공한 사람, 독특한 인생을 살고 있거나 살아온 분, 특수 직종 종사자 등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는 연재 코너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놓치지 않고 기사를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유튜브 ‘팩토리5F’에서 김태욱 ‘서울가방연구소’ 대표님이 ‘디올’ 가방을 수선하는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김 대표님은 리폼 업계에서 손꼽이는 장인이지만, 우리나라 법원(서울중앙지방법원)이 지난해 루이비통 가방을 리폼한 행위가 상표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판결했기 때문에 단순 수선하는 영상으로 보여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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