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몸으로 일한다 [6411의 목소리]

한겨레 2024. 5. 1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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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이 물류 창고에서 발송할 책을 찾고 있다. 필자 제공

김정임 | 물류업 종사자

우리 회사는 몸으로 일하는 곳이다. 거래처의 물건을 위탁 관리하며 출고 주문이 오면 물건을 찾아서 포장한 뒤 서점으로 배달하거나 개인 택배 발송을 하는 물류센터이다. 파주의 특성답게 주 종목이 책이고, 수험서 택배 발송이 주 업무이자 수입원이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읽는, 지식의 보고이자 마음의 울림을 주는 책이 우리 현장에서는 그냥 물건일 뿐이다. 크고 두껍고 무거우면 ‘어이구’ 소리가 절로 나오는 짐덩어리 물건이다. 그런데 “도서 물류업을 해요” 하고 나를 소개하면 왠지 “필통 보관업을 해요” “쓰레기통을 보관하지요”보다 뭔가 나은 걸 하는 듯한 우쭐한 기분이 든다.

이른 아침 사장님이 가장 먼저 회사에 나와 문을 열고 주변 정리를 하면 오전 여덟시부터 직원들이 출근한다. 사무실 프린터에서 주문서와 택배 송장이 쉼 없이 쏟아져 나오며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제작된 도서를 실은 큰 차가 수시로 회사 마당에 도착하면, 지게차가 오가며 물건을 내리고 들인다. 늘 안전사고에 주의해야 한다. 사람 몸을 다치지 않게 신경 써야 한다.

주문서대로 물건을 찾아서 스캔 검수 후 포장하는 일은 단순하지만 조금만 주의력이 흩어지면 택배 송장을 바꿔 부착하는 등의 실수로 이어진다. 출고 작업량은 상황별, 이슈별, 시즌별 다양한 변수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불규칙하다. 그날의 출고 주문은 그날 모두 마쳐야 한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룰 수가 없다. 거래처의 물건을 위탁 관리하며 발송하는 물류센터의 업무 특성이다. 고객사와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상황에도 마감을 해내는 책임감과 직원들의 업무 숙련도 그리고 팀워크다. 인공지능(AI)도 로봇도 대체할 수 없는, 오직 사람의 몸으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책을 스캔하고 상자 포장을 하다 보면 책 먼지, 상자 먼지를 온몸에 뒤집어쓴다. 먼지뿐만 아니라, 몸으로 일하기 때문에 팔, 다리, 허리, 온몸이 쑤시고 아픈 건 당연지사다. 작업을 마치고 장갑을 벗어 온몸을 툭툭 치면서 먼지를 털다가 문득 부모님 생각이 났다. 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하실까? 부모님은 평생 시골살이를 하시면서 과수원 농사, 텃밭을 일구셨다. 농사라는 게 말 그대로 오롯이 자기 몸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들일을 마치고 집에 오시면 현관 밖에서 장갑이나 수건으로 온몸의 먼지를 털어내셨다. 집 안에서 숙제를 하다가도 툭툭 옷 터는 소리가 나면 밖을 내다보곤 했다.

툭툭 먼지 터는 소리. 내가 온몸으로 일하고 있다는 그 소리에 마음 한곳이 저릿해진다. 엄마에게 나는 당신의 꿈이자 기쁨이었다. 엄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서 기쁨을 드리는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고민하기보다는 엄마의 기쁨을 위해 공부하는 딸, 남이 볼 때 착한 딸이 되려고 노력했다. 시골 살림에 비싼 4년제 사립대학 등록금을 대주셨지만, 대학에 가서 나는 흔들리고 방황하며 여기저기 기웃대기만 했다. 졸업 후에는 그저 그런 직장들을 다니다가 서른살에 결혼했다. 남편은 고등학교 졸업 뒤 밑바닥 현장에서부터 온몸으로 일해온 사람이었다. 인생에 대해 자신이 없고 불안했던 나는 확신 있고 추진력 있는 그에게 끌렸다.

5년 전 남편은 20년 직장 경험을 살려 파주 외곽의 공기 좋은 시골에서 물류 사업을 시작했다. 몸으로 일하는 만큼 직원들이 불편한 건 없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염려하며 일하고 있다. 온몸으로 일하다 보면 당당하고 정직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을 때가 많다. “열심히 살고 있어요, 정말 행복해요”라고 말씀드려도,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모습이나 여기저기 아파하며 끙끙대는 내 모습을 보면 부모님은 속상해하실지도 모르겠다.

우리 딸은 나처럼 옷에 먼지 묻는 일을 하지 않기를 기대하셨을까 하는 생각에 가끔은 마음 한편이 저리기도 하다. 어쩌면 길었던 이십대의 방황에 대한 죄송한 마음과 나의 자격지심일 것이다. 부모님은 늘 그렇듯 그저 자식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만을 기도하실 텐데 말이다.

누군가의 소중한 자산을 관리해주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안전하게 보내주는 나의 일. 먼지를 뒤집어쓰고 몸에 훈장처럼 근육통을 안고 사는 일이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즐거운 현장을 가꾸기 위해 오늘도 나는 달린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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