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로 당신의 독을 빼주겠다는 이 남자...재료가 평양OO이라고? [푸디人]

안병준 기자(anbuju@mk.co.kr) 2024. 5. 1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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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디인-29] 황인규 앤티도트 바텐더 (feat. 버번 위스키 우드포드 리저브)

‘등잔 밑이 어둡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도리어 잘 알지 못할 때 흔히 쓰는 속담이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대흥역 인근 앤티도트(Antidote) 바를 처음 갔을 때 머릿속에 이 속담이 떠올랐다. 불과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이렇게 괜찮은 바가 있었다니…

경의선 숲길이 활성화된 이후 주변 상권이 많이 발전했다고는 했지만 ‘힙’한 곳을 몰라뵌 것에 대한 자기반성이 저절로 나왔다. 강남과 청담에만 꼭 좋은 바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말이다.

영어로 ‘해독제’라는 의미의 앤티도트는 캐나다에서 온 2명의 한인 교포가 세웠다.

스트레스와 피로로 찌든 현대인에게 알코올 섞인 칵테일 한잔으로 정신과 마음의 해독을 도와주고 싶다는데 술로 치료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설득이 되고 싶다. 디오니소스가 포도나무와 포도주의 신이자, 풍요의 신이며 황홀경의 신인 이유도 이 때문이겠지.

시그니처 칵테일 메뉴는 바 이름의 의미답게 ‘해독제’스럽다. 깻잎, 바질, 더덕, 버섯, 구아바 등을 이용한 칵테일인데 종류가 무려 15종이다. 의료 차트처럼 생긴 개인별 종이 주문서에 시그니처 칵테일을 마실 때마다 표시해주는데 15종을 모두 마시면 하우스 블렌디드 위스키를 선물로 준다고 한다. 바 한쪽에 놓여있는 오크통에서 숙성되고 있는 하우스 위스키는 또 어떤 맛일까?

앤티도트의 칵테일 메뉴. 안병준 기자
시그니처 칵테일 중 바질 칵테일을 한잔했는데 역시나 술인가 약인가 혼란스러웠다. 바질의 향과 맛, 색상이 오감을 통해 내 몸에 흡수되는데 마치 온 몸이 정화되는 알 수 없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바질의 색감이 너무 예쁘게 잘 드러나 여자친구에게 꼭 한번 추천해주고 싶은 칵테일이다. 2021년 문을 연 앤티도트에서 아직 없어지지 않은 메뉴라고 했는데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앤티도트의 바질 칵테일. 안병준 기자
성소수자에 응원의 메시지 전한 칵테일로 우승
우드포드 리저브 원더풀 레이스 2024의 결선 진출자 기념사진. 황인규 바텐더(가운데)가 활짝 웃고 있다.
앤티도트를 알게 된 건 바텐딩 대회 ‘원더풀 레이스 2024’에서 우승한 황인규 바텐더(27) 덕분이었다.

원더풀 레이스는 최고급 버번 위스키인 우드포드 리저브를 활용해 창의성과 스토리가 담긴 칵테일을 선보이는 대회로, 황 바텐더는 약 8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는 우승과 함께 ‘원더풀 레이스 아시아 그랜드 파이널’에 참가할 한국 대표 바텐더로서 선정돼 세계 무대에서 다른 나라의 내로라하는 바텐더들과 자웅을 겨루게 된다.

바텐더 생활 7년만에 첫 우승을 거머쥔 그에게 시그니처 칵테일을 꼽아달라고 하자 3가지 칵테일이 물망에 올랐다.

조향사와 협업해 만든 ‘비자림’, 앤티도트에서 만든 첫 시그니처 중 하나인 ‘구아바’, 그리고 첫 대회의 우승을 안겨준 ‘When we are trying to start(우리가 시작하려 할 때)’였다.

그 중 그가 이번 대회에 선보인 우승작 ‘우리가 시작하려 할 때’는 그에게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듯했다. 개인의 정체성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커밍아웃을 주제로 선정한 동시에, LGBTQ(성소수자) 커뮤니티를 향한 응원의 메시지도 담았기 때문이다.

“외국에는 다양한 친구들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LGBTQ 커뮤니티 안에 있는데 뭔가 솔직하게 얘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불과 5년 전 까지만해도 배척을 받던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 첫 경험을 어떻게 하느냐가 다음에 일어나는 일들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첫 시작이 편안하고 행복하길 바란다는 의미로 칵테일을 만들게 되었죠.”

그는 우승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위기를 겪기도 했다.

황 바텐더는 2차 심사 때 랜덤박스 미션에서 민트를 으깨서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칵테일을 제조할 때 재료를 으깨는 용도로 사용하는 ‘머들러’가 없었다. 주최측으로부터 바에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기구들은 다 있다고 전해 들었는데 마침 그가 준비해온 칵테일에 필요한 도구가 없었던 것이다.

“주변에서 농담으로 주먹으로 으깨라고 할 정도로 당황했어요. 그러나 칵테일을 만들 때 민트를 조금 추가하고, 만드는 과정에서 향을 추가하는 방법으로 대체해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죠.”

그는 다음 달 미국에서 열릴 파이널 대회에 대해 기대감이 높았다.

“결과에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배우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죠. 제가 앞으로 바텐더를 하면서 다른 나라의 훌륭한 실력을 갖춘 바텐더들과 한 공간에서 함께 하고 같은 주제를 고민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설렙니다.”

우드포드 리저브 원더풀 레이스 2024 우승작 칵테일인 황인규 바텐더의 ‘When we are trying to start(우리가 시작하려 할 때)’.
누나가 추천한 로맨스 웹툰이 인생을 뒤흔들다
로맨스 계열의 웹툰인 핑크레이디
그가 바텐더의 꿈을 꾸게 된 것은 우연에서 비롯됐다. 중학교 2학년 때, 친누나가 추천해 준 만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바텐더로 일하는 모습에 매료된 것이다.

“로맨스 계열의 웹툰인 핑크레이디였는데, 바텐더라는 직업이 멋있어 보였어요.”

이후 바텐더가 되기 위한 진로를 고민하던 차, 그의 아버지의 강력한 설득으로 4년제 대학교에서 꿈을 키워나가기로 했다. 수원대학교 외식경영을 전공하며 바리스타, 조주기능사 자격증, 소믈리에 공부를 병행했다. 그러나 이론 공부로만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생겼다.

“후배 중 정말 바텐더가 되고 싶다면, 현장에 뛰어들어서 직접 배우는 걸 가장 추천할 것 같아요.”

그는 2017년, 당시 21살의 나이에 바에 취직했다. 그 때만 해도 바를 유흥주점 정도로 생각하는 고객들이 많았고 동료 여성 바텐더에게 추근대는 손님들도 더러 있어 마음고생을 겪어야 했다. 또한 20대 초반에 낮과 밤이 뒤바뀐 바텐더의 삶을 살다 보니 친구와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가장 좋아하는 걸 하고 있지만 외로움이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꿋꿋이 견뎌냈고 칵테일 펍, 전통주 바, 클래식한 위스키 바 등을 거쳐 작년 4월 앤티도트에 합류했다.

이제 바텐더 7년차가 된 그에게 바텐더로서 갖춰야할 덕목을 물어보자 ‘경청’과 ‘공감’의 키워드를 꺼냈다.

“바텐더를 오랫동안 즐기면서 하고 싶다면, 경청하는 능력과 공감 능력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부분이 바텐더는 말을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듣는 게 더욱 중요하죠. 칵테일을 만드는 기술이나 미각적인 부분은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훈련과 연습을 통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 바텐더가 첫 대회의 우승을 안겨준 ‘When we are trying to start(우리가 시작하려 할 때)’ 칵테일을 만드는 모습. 안병준 기자
평양냉면 칵테일이라고 들어는 봤니?
앤티도트를 찾은 고객들의 개인별 주문서. 의료차트처럼 생긴 주문서가 인상적이다. 안병준 기자
바텐딩을 단순히 술을 섞는 행위쯤으로 치부하면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고객은 바텐더가 준비된 재료를 섞어 만들어주는 짧은 순간의 모습만 보게 되지만 그에 앞서 칵테일 한잔을 창작하기 위해 바텐더들이 들이는 노력은 셰프와 비견된다. 수많은 재료를 다양한 요리법으로 조리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물론이고 칵테일의 근간이 되는 술과의 조화도 생각해야 한다.

“아직 많은 분들이 칵테일은 저렴한 재료로 달콤새콤하게만 만든다고 생각하세요. 칵테일에 들어가는 재료를 만들기 위해 길게는 3일이 소요되는 것도 있을 만큼 많은 정성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의 우승작 칵테일 ‘우리가 시작하려 할 때’와 함께 같이 제공되는 초콜릿도 단순한 초콜릿이 아니다.

초콜릿 매쉬와 초콜릿 원료 중 하나이면서 성분이 기름인 카카오닙스를 저온 조리하면 기름이 빠지고 초콜릿은 녹아 섞이게 된다. 이를 냉동시키고 다시 거르면 맛과 향은 있는데 기름기가 없는 맑은 비터 초콜릿이 된다.

그는 올 여름 평양냉면 칵테일을 선보이기 위해 막바지 연구 중이다.

소나 양의 콩팥 주위의 동물성 지방인 두태기름과 사골육수를 저온에서 같이 우려내고 냉동시키면 기름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 주스처럼 만든 무랑 오이와 술을 섞어 칵테일로 내놓을 계획이다. 아직 베타 버전인 평양냉면 칵테일을 마셔봤는데 진짜 평양냉면 국물에 알코올을 섞어놓은 기상천외한 맛이었다. 아직은 2% 부족한 듯했지만 어떻게 완성이 될지 기대감이 높아진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꿈을 물었다.

“조금 더 많은 대회와, 경력, 해외 게스트 경험을 쌓는 게 개인적인 목표이고 ‘아시아·월드 베스트 50’ 에 앤티도트를 올려 놓고 싶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소비자가 완전히 설득되는 칵테일을 선보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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