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반장1958' 이정재, 당시 신문 1면에 보도된 그의 최후

금준경 기자 2024. 5. 18.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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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수사반장1958'에 등장한 실존 인물인 이정재는 경찰도 좌우하는 강력한 실권자로 등장한다.

드라마에선 경찰도 함부로하지 못하는 이정재와 동대문파의 위세를 보여주는데 실제 그는 경찰의 비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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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이정재의 동대문파 비호… 경찰 인사 관여했다는 증언도
드라마에서 생략된 최후, 끝까지 혐의 부인하다 사형집행

[미디어오늘 금준경 기자]

▲ 드라마 '수사반장 1958' 속 이정재

MBC 드라마 '수사반장1958'에 등장한 실존 인물인 이정재는 경찰도 좌우하는 강력한 실권자로 등장한다. 드라마에선 경찰도 함부로하지 못하는 이정재와 동대문파의 위세를 보여주는데 실제 그는 경찰의 비호를 받았다. 이정재와 관련한 기록을 짚었다.

실제 경찰도 이정재를 비호했다

이정재가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인 이기붕을 아버지로 모시며 이승만 정권 여당의 '정치깡패'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극 중에선 종남경찰서장과 회동을 하고 경찰의 수사에 관여하는 모습이 나오는 등 경찰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이 여러차례 나온다.

동대문 이정재와 명동 이화룡의 회동을 앞두고 종남경찰서장은 경찰을 동원하며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화룡 쪽에서 도발시에만 제압하고 이정재 회장측 도발시에는 관망하면서 명령을 기다린다”고 지시한다.

이정재는 실제로 경찰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2014년 '향토서울'에 게재된 <자유당 정권에서의 정치테러>논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드라마 '수사반장1958' 의 한 장면. 이정재와 이화룡 회동을 앞두고 이정재의 동대문파를 비호하는 모습.

“1950년대 동대문시장파의 두목인 이정재가 연루된 테러사건은 몇 차례 이슈화된 바 있다. 그러나 경찰은 자유당에 당적을 갖고 있던 이정재와 그의 조직에 대해 적극적으로 수사하려고 나서지 않았다. 1958년경 서울의 양대 세력인 동대문시장파와 명동파가 심각한 충돌을 빚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을 때, 경찰이 정권에 비협조적인 명동파 세력을 집중적으로 검거했던 반면 동대문시장파에 대해서는 하부조직원 몇 명만 구속 하는데 그쳤다.”

2021년 SBS '꼬리의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 출연한 당시 동대문파의 일원은 “막말로 그 당시 경찰서장 인사이동까지도 관여를 할 정도였다”며 “'인사이동이 있을 거다' 그러니까 경찰서장이 와서 '협조 좀 해주십시오'하고 인사하고 갔다고 그러더라”고 했다.

드라마에서 생략된 이정재의 만행과 최후

드라마에선 경찰과의 관계를 주로 그려내다 보니 이정재의 여러 악행들은 생략됐다. 이정재는 시라소니 린치사건, 단성사 저격사건, 사사오입 개헌 당시 국회방청 난동, 자유당창당지회 행사 방해, 대선 당시 야당 집회 방해 및 테러, 장충단 공원 정치테러 등 사건을 주도한다.

그는 정치테러를 반복했음에도 당시엔 처벌을 받지 않는다. 김두한 전 의원의 육성 기록에 따르면 이정재는 국회에 찾아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해온 김두한 의원에게 권총을 겨눈 일도 있다. 이정재의 조직은 4·19 혁명 당시 고려대생을 폭력진압해 논란이 되기도 한다.

▲ 1961년 8월12일 경향신문 1면에 게재된 이정재가 사형 구형을 받은 소식을 담은 '깡패 이정재에 사형구형' 기사. 자료=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그러나 그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징역 8개월의 가벼운 처벌만 받는다. 그런 가운데 1961년 5월16일 군사투데타 이후 혁명재판부는 그를 체포해 과거 범죄를 다시 수사한다. 재판 전 쿠데타 세력은 이정재를 비롯해 200여명의 깡패들에게 시가행진을 시킨다.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라는 현수막과 함께 깡패 대열의 맨 앞에 이정재가 있었다. 쿠데타 세력이 민심 수습책의 일환으로 깡패소탕에 나섰고, '조리돌림'을 한 것이다.

이정재는 재판 당시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이 부패한 정치의 장난으로 나를 유인한 거다. 억울합하다”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그의 재판은 연일 언론에 보도됐다.

그의 사형 판결 소식은 1961년 8월17일 경향신문, 동아일보 등 신문 1면에 실릴 정도로 주목 받았다. 경향신문은 이날 기사에서 판결 당시 이정재의 반응을 구체적으로 담았다. “왕년의 깡패대장 이정재는 뺨에 사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야릇한 미소를 짓는듯 하더니 다시 무표정, 그러나 다음 순간 그도 눈시울을 붉혔다 입술을 더욱 굳게 다물었다.” 경향신문은 재판 후 심판관들이 퇴장하는데도 이정재는 멍하게 서 있었다고 했다. 이정재는 사형확정 21일 만에 사형이 집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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