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온난화는 끝났다, 펄펄 끓어오른다”…기후 변화에 와이너리도 탈바꿈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4. 5. 18.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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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온난화의 시대는 끝났다(The era of global warming has ended).”

지난해 7월 안토니우 구테흐스(Antonio Guterres) 유엔(UN) 사무총장은 뉴욕 유엔 본부에서 지구온난화의 종식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제, 지구가 끓어오르는 시대가 왔다(Now, the era of global boiling has arrived).”

구테흐스 사무총장의 발언은 유럽연합(EU)과 세계기상기구(WMO) 가 발표한 새로운 데이터에 기반한 것입니다. 데이터에 따르면 2023년 7월 지구 기온은 인류가 측정을 시작한 이후 쓰여진 모든 기록을 깨뜨렸다 합니다. ‘이제는 정말 위험해!’라는 절박한 호소인 셈입니다.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 산 정상 부근 해발 800m에 위치한 릿지(Ridge) 와이너리의 올드바인(늙은 포도나무)에서 새 순이 자라고 있다. 와이너리 너머 산 호세 시내와 샌프란시스코만이 보인다. [전형민 기자]
기후 위기가 불러온 트렌드, 지속가능성
기후와 환경의 변화는 당연하게도 지구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 인류의 모든 부분에서 엄청난 변화를 야기합니다. 당장 매년 역대급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여름과 겨울의 극단적인 온도차를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단순히 덥고 춥고를 넘어서 해충 유발, 농작물, 수산물 변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는 매년 엄청난 변화를 직면하고 있습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농업, 그 중에서도 특히 환경에 민감한 와인 산업도 변화가 극심합니다. 와인의 기본 재료가 되는 포도는 자라나는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특성을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새로 자라기 시작한 포도나무.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드는데다 씨앗을 심어서 키우는 경우 유전형질이 변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보통 이렇게 아예 새로 키우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산 후안 바티스타 포프라첨(Popelouchum) 와이너리에서. [전형민 기자]
양조학에서는 아예 이런 기후·환경적 특성을 떼루아(terroir)라고 별도의 용어로 정의하고, 개별 와인의 특성과 연관지어서 설명합니다. 같은 와이너리의 와인이더라도 빈티지에 따라 캐릭터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도 이런 특성 때문이죠.

이 때문에 전세계 와인 단체와 와이너리들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앞다퉈 연구하고 있습니다. 화학비료 사용 이전의 과거로 극단적으로 회귀하는가 하면 아예 최첨단 신기술을 도입하기도 하죠.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지속가능성(sustainable)이라는 단어로 정의합니다.

물론 지속가능성이 와인 산업에서만 통용되는 단어는 아닙니다. 최근 여러 산업에서 10여년 전부터 유행했던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대체하는 주요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으니까요.

미국 지속가능성 와인생산자 서밋. 지난 1일 캘리포니아 로다이(Lodi)에서 열렸다. [전형민 기자]
불 붙기 시작한 캘리포니아의 지속가능성
미국 서부 해안에 위치한 캘리포니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변화에 민감하고 빠른 곳입니다. 애플과 구글, 메타(옛 페이스북) 등의 본사가 위치한 최첨단 기술의 성지, 실리콘 밸리가 있다보니 미국 내에서도 가장 소득이 높은 주(州)에 속합니다.

높은 소득으로 인한 여유 덕분일까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 데에 좀 더 개방적인 면이 있죠. 최근엔 완전자율주행 상업용 택시 웨이모(Waymo)가 이미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광화문에서 지정된 노선을 따라 자율주행셔틀이 달리고 있지만, 대도시에서 자율주행차가 베타 버전이 아닌 일반인을 상대로 전면 영업에 나선 것은 최초입니다. 괜히 원조 테스트베드라 불리는 게 아닙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주행하는 상업용 자율주행택시 웨이모(Waymo). [전형민 기자]

캘리포니아는 전세계적인 와인 산지로도 유명합니다. 미국 내 와인 생산량의 90%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와인을 생산하고 있고, 유럽 와인에 비해 합리적인 가격, 직관적인 맛과 향으로 와인을 접하기 시작한 초보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빠지는 와인입니다.

스택스립(Stag’s Leap), 실버오크(Silver Oak), 케이머스(Caymus) 등 중후하고 농밀한 보르도 스타일 고급 와인들은 초보자 뿐만 아니라 애호가들에게도 인기가 좋고요.

신기술에 대한 친화적인 분위기 때문일까요? 캘리포니아 와인 생산자들은 지속가능한 와인 생산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실상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글로벌 테스트베드를 자처하는 동네 분위기에 업계 지배종이기도한 캘리포니아 와인이 글로벌 트렌드인 지속가능성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976년 제1회 파리의 심판 당시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스택스립 와인이 프랑스의 와인들을 제치고 1등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전한 주최측의 편지. 나파 밸리에 있는 스택스립 와인 셀러에서. [전형민 기자]
자원을 아끼고 관리하려는 노력
캘리포니아는 최근 몇년 간 물 부족으로 큰 곤란을 겪었습니다. 한여름 부족한 물을 아끼기 위해 가정 집 잔디에도 마음대로 물을 주지 못하게 한다는 뉴스를 접한 기억이 있을 겁니다. 기후 변화로 가뭄이 연이어 도래하면서 입니다.

극심한 가뭄은 물의 사용이 중요한 와인 산업에 치명타였습니다. 캘리포니아 와인 생산자들이 앞다퉈 에너지 순환 시스템 구축에 나선 이유죠.

로다이(Lodi)에 위치한 랭트윈스(LangeTwins) 와이너리는 부지 내에 자체 저수용 연못들을 만들었습니다. 연못을 통해 빗물 혹은 이미 한번 사용된 물을 모으고 정화해, 필요할 때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킵니다.

와인 양조 후 남은 찌꺼기 등 부산물을 지렁이를 배양하는 데에 활용해 양토로 전환하는 랭트윈스(LangeTwins) 와이너리. [전형민 기자]
여러 개를 만들어 물의 오염 정도에 따라 등급을 두어 관리하고, 단계별로 정화할 수 있는 시스템도 구축했습니다. 이렇게 정화한 물은 양조통 세척과 와이너리 관개에 사용됩니다.

양조시설 위로는 가림막 같은 태양열 집열판을 설치했습니다. 해를 가려주는 역할과 동시에 와이너리에 필요한 전기 일부를 직접 생산할 수 있죠. 또한 양조하고 남은 포도 찌꺼기는 지렁이를 키워 흙에 주기 위한 양분으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소노마 카운티 힐즈버그(Healdsburg)에 위치한 실버오크(SilverOak) 와이너리는 양조과정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CO2)를 포집해 보관하기도 합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닌 만큼 자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 입니다.

힐즈버그에 위치한 실버오크 와이너리 양조 설비의 이산화탄소 포집기. 스테인리스로 된 대형 원형 발효조 옆으로 삐죽 나온 호스들이 이산화탄소를 포집한다. [전형민 기자]
토양을 원래의 모습으로… 재생 농업
나파 밸리에 위치한 매티아슨(Matthiasson) 와이너리에서는 좀 더 근본적인 방법을 연구합니다. 포도밭의 생물다양성을 과거와 같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오너이자 지난 1999년 일찌감치 캘리포니아 와이너리들의 지속가능한 행동 교범(California manual on sustainable vineyard practices)을 작성했던 스티브 매티아슨은 자신들의 활동을 재생 농업(Regenerative farming)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면, 산업 혁명 이후 지력을 돋우기 위해 당연하게 쓰여온 화학비료나 살충제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와이너리는 단지 그 시도 만으로 수년만에 자생 식물과 좋은 곤충(익충)이 돌아오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재생 농업을 한 땅(오른쪽)과 화학 비료를 쓴 땅(왼쪽)의 차이. [전형민 기자]
토착 자생 지피 식물이 늘어나면서 토양의 습도 유지가 오히려 더 용이해졌습니다. 더구나 토양에 생물 다양성이 늘어나면서 포도나무의 면역 체계에 오히려 약간의 자극(질병 압력)이 주어졌고, 덕분에 포도 나무가 병충해에 더 강해지는 효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이렇게 재배된 과실로 만든 와인 역시 떼루아를 반영한 특별한 캐릭터를 가지게 됐습니다. 당도는 조금 낮지만 훨씬 잘 익고 튼튼한 포도를 얻게 되면서 기존 나파밸리 스타일과는 다른 섬세하고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아로마를 가진 스타일의 와인이 탄생한 겁니다.

재밌는 것은, 유기농 양토를 조성하게 되면서 포도 생산량도 오히려 상승했다는 점입니다. 당장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사용하는 게 단기적인 효과를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장기적인 순환과 지속가능성의 측면에서는 재생 농업이 훨씬 낫다는 설명입니다.

AI 기술을 접목한 전기 트랙터
리버모어의 웬티(Wente) 와이너리에서는 좀 더 다른 방식을 시도합니다. 탄소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농사에 필수적인 트랙터를 모나크 트랙터(Monarch tractor)라고 불리는 전기트랙터로 교체한 겁니다.

AI 기술이 도입된 모나크 트랙터는 운전자 없이 24시간 내내 포도밭 사이를 누비면서 활동합니다. 기존 경유 트랙터에 비해 약 3배 정도 비싸지만 운전하는 인력이 필요하지 않는데다, 유지비가 적게 들기 때문에 비용면에서도 효율적이죠.

웬티 와이너리에서 운용하는 모나크 트랙터. 전기 트랙터고 AI 기술을 도입해 전자동으로 쉬지 않고 일한다. [전형민 기자]

탄소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와인병의 무게를 줄이는 시도는 이미 흔합니다. 한때 두껍고 무거운 병이 고급 와인의 상징처럼 보였지만, 이제는 경량화가 추세인 것이죠.

아예 일부 와이너리는 실험적으로 종이와 PET를 활용한 와인병을 만들어 출시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형태의 병들이 와인의 품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밝혀졌고 더 저렴하고, 깨질 염려도 없습니다. 유일한 문제는 소비자의 인식입니다.

캘리포니아 와이너리들이 지속가능 와인생산의 일환으로 다양한 용기를 출시하고 있다. 왼쪽부터 캔, 경량화 유리병, 종이와 PET로 만든 병, 알루미늄 병. [전형민 기자]
노동력 수급 문제도 지속가능성
캘리포니아 와인의 지속가능성은 환경과 유기농, 탄소배출 문제에 그치지 않고, 노동(labor) 문제까지 파고듭니다. 와인을 양조하는 일의 대부분은 포도밭을 경작하고 포도를 수확하는 농업이죠. 많은 부분을 기계화·자동화했다지만 여전히 노동력이 필요합니다.

일부 와이너리는 고품질을 위해 사람의 노동력만을 사용하기도 하고요. 상당수의 캘리포니아 와이너리 역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기 때문에 일부 와이너리는 이를 원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지속가능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더튼 랜치 와이너리에서 노동자들에게 제공하는 숙소. 미국의 여느 서민 가정집과 별로 다르지 않다. 와이너리 내에 이런 식의 숙소가 여러 개 지어져있다. 노동자들은 무상으로 숙소를 대여해 생활할 수 있다. [전형민 기자]
러시안 리버밸리 인근 더튼 랜치(Dutten ranch) 와이너리가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부지 내에 주택을 짓고 외국인 노동자들(대부분 멕시코인)에게 무상으로 대여합니다.

미 연방법에 맞춰 만들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와이너리가 노동자를 직접 보증하고 초청하는 방식입니다. 노동자들의 시급은 19달러(약 2만6000원), 1년 중 10개월(2개월은 휴가)을 주 5일 40시간(최대 52시간) 근무합니다.

와이너리는 프로그램을 통해 좀 더 우수한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고, 노동자는 생활이 안정되니 일석이조인 셈입니다. 실제로 더튼 랜치 와이너리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대를 이어 와이너리에서 일하는 숙련된 농부라고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 인근 몬테벨로 산 정상 부근 해발 800m에 위치한 리지 와이너리 전경. 리지 와이너리는 파리의심판에서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프랑스 와인을 꺾은 보르도 스타일 와인을 양조한다. [전형민 기자]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
다만 이런 노력들을 접하다보면 ‘지속가능성은 그만큼 여유가 있고, 많이 가진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듭니다. 실제로 위에 언급한 많은 것들이 상당한 초기 자본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죠. 특히 가성비와 효율성을 중요시 여긴다면요.

생각해볼만한 문제이자 난제입니다만, 확실한 것은 캘리포니아 와인의 품질이 지금 이 순간에도 좋아지고 있고 이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캘리포니아 와인을 찾고 있다는 점입니다.

와인의 품질이 좋아지고 인기가 상승하는 것에 지속가능한 생산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속가능성과 환경이라는 화두가 현재 가장 인기있는 글로벌 트렌드라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겠습니다.

토양, 연못, 유기농, AI 전기트랙터와 노동까지… 지속가능성을 설명하고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일주일 간의 짧은 여정에서 만난 한 캘리포니아 와인 양조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는 게 바로 지속가능성이야.”

아직도 아리송하다고요? 어쩌면 이 분야를 아주 초기부터 연구해온 스티브 매티아슨의 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은 연결돼 있습니다.”

매티아슨 와이너리의 한편에 비치된 그림. 포도밭과 주변 환경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렸다고 한다. 모든 게 연결돼있기 때문에 그것을 잘 가꾸고 유지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진 스티브 매티아슨의 말과 잘 어울린다. [전형민 기자]
*이번 와인프릭은 캘리포니아와인협회(CWI)의 초청으로 11개국 와인 전문가들과 함께한 서밋 내용을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기자가 직접 산타크루즈와 산 후안 바티스타, 리버모어, 로다이, 나파, 소노마, 힐스버그 등 캘리포니아 지역 주요 와이너리를 방문하고 경험한 바를 공유합니다. 좋은 기회를 기꺼이 제공해준 CWI와 특히 한국사무소에 특별히 감사를 표합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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