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어나길 소망하기, 《목화솜 피는 날》
(시사저널=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10년 전 참혹한 사고로 딸을 잃은 아버지는 기억마저 잃어간다. 지갑을 열어 신분증을 보기 전까지는 자신의 이름도 잊었던 듯 보인다. 그에겐 '딸 경은에게 가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 하나만 남아있다. 그가 기억을 잃고 떠도는 사이, 아내는 텅 비어버렸다. 어느 쪽이나 삶의 어느 부분이 손쓸 수 없이 망가져버린 건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는다는 고통의 무게는 그런 것이다.
《목화솜 피는 날》은 2014년 4월16일, 세월호와 함께 바다 아래 가라앉아버린 사람들의 마음들을 주목한다. 벌써 10년, 혹은 아직 10년. 영화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과 어쩌면 영원히 존재할 응어리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잊지 않겠다'는, 대부분 진심이지만 때론 무의미한 문구처럼 외던 말에 가려졌던 사람들 말이다.
그만둘 수도, 나아갈 수도 없던 10년
'기억하겠다'는 말에는 어떤 힘이 있을까. 중요한 다짐이지만 어디까지나 말뿐이다. 결정적 순간에는 무용하다. 항구에서 여전히 나부끼는 노란 리본의 빛이 바랬듯, 기억의 색이 바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만하라"는 말은 대부분 이들로부터 나온다. 《목화솜 피는 날》의 병호(박원상)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기억을 잃은 모습은 그래서 더욱 저릿하게 다가온다. '기억하겠다'는 타인의 말들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기억에 집착하다 결국 잃어버리고 만 사람이라서.
영화 속 경은의 가족은 그만둘 수도, 그렇다고 앞으로 힘 있게 나아갈 수도 없는 상태로 10년을 보냈다. 사실상 견디다시피 한 세월이다. 병호가 안산에서 진도로, 다시 목포로 정처 없이 떠도는 동안 아내 수현(우미화)은 무력함에 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다만 동생에 이어 아빠까지 잃을까 걱정하는 큰딸의 슬픔과, 더는 유가족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현에게 서운함을 내비치는 이들의 안부를 일일이 알은체하기에는 벅찰 뿐이다. 그간 남편을 내버려둔 건 무책임한 방치가 아니다. 자식을 잃고 헤아릴 수 없이 애끓는 심정을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눈물도 다 마른 듯 보였던 수현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겨우 참았던 울음을 토해 낸다.
《목화솜 피는 날》이 주목하는 건 세월이 만든 풍경이다. 영화는 10년 전 참사의 애통한 긴박함이 아니라, 거대한 슬픔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여전히 남은 것들을 들여다본다. 그 세월은 비단 유가족들만의 것이 아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일단 현장으로 달려갔던 이들, 구조 작업뿐 아니라 이후 진상 규명에 함께 동참했던 이들, 참사의 흔적이 남은 공간에서 그래도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마을 주민들, '당사자'라는 단어에 포함될 수 있는지 아닌지로 서로를 구분하고 갈랐던 이들, 각자의 애도를 멈추지 않았던 이들, 그 모두의 것이다. 영화가 견지한 이 다각도의 시각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우리 각자의 시간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야기는 단원고와 가족들의 공간인 안산, 세월호가 가라앉은 진도 팽목항, 인양 후 녹슬고 바랜 세월호를 세워둔 목포까지 세 개의 공간 배경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공간은, 선체의 내부다. 《목화솜 피는 날》은 극영화 최초로 세월호 내부를 담았다. 감정적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장면 또한 여기에서 만들어진다. 세월호는 홀린 듯 계속해서 안산과 진도 이곳저곳을 떠돌던 병호가 끝내 당도한 곳이다. 고요하게 텅 빈 선체의 내부, 병호는 살아있는 것의 온기가 모두 사라진 그 낡고 녹슨 공간 안에 드러누운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딸의 목소리를 듣는다.
카메라가 세월호 내부로 들어간 이유
선체의 내부로 다가가는 병호의 경로는 그간의 세월에서 유가족들에게 어떤 기억이 남았는지 그들의 사연으로 들어가는 극의 흐름과 조응한다. 관객은 그렇게 유가족이라는 특수한 집단이 지닌 내부의 기억을 본다.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시민들의 그림 참여를 유도하는 거리 행사에서, 처음에 호의적으로 다가오던 젊은 아이 엄마는 '세월호'라는 단어에 불편하게 반응하며 이내 자리를 뜬다. "이제 크는 애한테 죽음을 생각하라는 게 너무한 것 같다"는 게 이유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고 죽음이 삶보다 더 크게 자리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은 그 무례함 앞에서 입을 다물어버린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유가족 사이에 생겨난 갈등이다. 사람들을 모으고, 진상 규명을 위해 애썼던 병호는 자신의 슬픔과 고통이 너무 크기에 벌인 행동들로 주변을 힘들게 만든다. 그저 진실이 알고 싶었던 것뿐인 이들의 애타는 하루하루에는 의도치 않게 또 다른 상처와 아픔이 쌓여간다. 그리고 일부는 그대로 굳어져 버린다. 같은 유가족 안에서도 슬픔에 대처하는 각자의 태도와 반응은 다르기에 생겨난 일이다. 영화는 외부적 반응뿐 아니라 당사자들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에까지 솔직하게 접근하고자 한다.
결국 그것은 하나의 마음으로 향한다. 사회적 참사를 목격하고 분노하며 애도한 각자의 10년. 그 안에서 어떤 이들은 가슴에 묻으라 했다. 어떤 이들은 곡해와 혐오를 숨기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그만하라고 말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는 무책임한 질문 앞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시간이 흘러 아이들을 다시 만나는 날, '다 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고 싶은 바람. 유가족의 여정은 그 하나를 위한 것이었다. 때론 주저앉고 멈추기도 하면서 조금씩 걸어온 10년의 동력이다.
영화의 제목에는 우리 사회가 힘없이 놓쳐버린 이들이 언젠가 어디선가 다시 귀한 존재로 피어나길 바라는 소망이 깃들어있다. 나무에 꽃이 핀 후에 열리는 열매. 너무 고와서 두 번째 꽃이라 불리는 목화로는 광목천도 만들고, 아기 기저귀나 이불도 만든다. 인간의 생과 함께하는 열매인 셈이다. "우리 경은이도 팡 하고 다시 필 거야. 목화솜처럼. 누군가의 아이로 다시 태어나서 예쁘게 잘 크고 있을 거라고." 수현의 대사는 세월호를 기억하려는 모두의 바람이기도 하다.
■ 세월호 참사 10주기 프로젝트
《목화솜 피는 날》은 세월호 참사 10주기 장편 극영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레즈비언 정치 도전기》(2009), 《두 개의 문》(2012) 등을 제작한 다큐멘터리 제작 집단 연분홍치마와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가 공동 기획해 제작했다.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은 세월호 참사 10주기 영화 5편의 총괄 프로듀서다. 《목화솜 피는 날》을 비롯해 앞서 개봉한 《바람의 세월》, 아이의 흔적을 붙잡는 어머니들의 이야기 《흔적》, 당시 현장 취재 보도의 목소리를 담은 《그레이존》, 생존 학생들이 주인공인 《드라이브97》까지 세 편을 엮은 옴니버스 다큐 《세 가지 안부》도 지역 공동체 중심으로 상영 중이다. 드라마 《소방서 옆 경찰서》 《녹두꽃》 《육룡이 나르샤》 등을 연출한 신경수 감독이 연출하고, 연극 《아들에게》 등을 써온 구두리 작가가 각본에 참여했다. 세월호 참사 가족 극단 노란리본의 어머니들도 영화에 배우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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