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영원한 집’ 꿈꿨던 그 마음…간송미술관이 돌아왔다

한겨레 2024. 5. 1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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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
보화각 1938: 간송미술관 재개관전
원형 최대한 살려보수공사…간송의 도면·스케치도 전시
계단용 대리석 견본들도 나와…30대 간송의 고민 생생
보화각 2층 전시장의 모습. 진열장과 조명등은 1938년 개관 당시 것과 새로 제작한 것을 함께 활용했다. 간송미술관 제공

1938년 서울 성북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 보화각(간송미술관의 전신)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24년 봄, 이곳에서 2년 만에 새 전시가 열리고 있다. ‘보화각 1938: 간송미술관 재개관전’(6월16일까지). 1년 반에 걸쳐 보수를 마친 간송미술관 속 보화각은 얼핏 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찬찬히 둘러보면 86년 전 설립 당시 근대 건축의 모습을 복원해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서의 존재 의의를 살리되, 수장고와 전시 환경을 개선하고 점자 안내,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접근성을 높이는 등 현대 미술관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필수 기능을 성실하게 보강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조명과 자단목 진열장

간송이 보화각 진열장 설계에 참고하려고 국내외 미술관을 방문해 남긴 스케치. 간송미술관 제공

다시 문을 연 보화각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2층 전시실 천장에 달린 둥근 펜던트 조명이다. 1930년대식 조명과 2020년대식 최신 조명이 함께 달린 천장은 한 세기 만에 단장을 마친 보화각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포인트 중 하나다. 덮개와 부속을 깨끗하게 소제하고 밝기 조절을 할 수 있도록 손보아 그대로 활용하되, 작품을 비추는 조명등은 추가로 설치한 최신식 조명 기구를 활용했다.

간송이 기와집 10채 값을 치르고 들여온 붉은 자단목 소재 진열장 역시 유리와 내장재를 교체하고 전문 수리를 거쳐 다시 전시에 활용하고 있다. 낡은 것을 다 들어내고 새것으로 채우는 대신, 그에 못지않은 노력과 비용을 들여 손보고 ‘많이 달라진 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2년 전 공사에 들어가기 전의 모습이 지난 80여년 동안 간송미술관을 사랑한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비추었다면, 재개관전은 그 사랑이 탄생하던 어느 해의 뜨거운 마음 앞으로 관람객들을 데려간다.

이 전시는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옛 자료들을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소장품과 자료를 정리하고 옮기는 과정에서 청사진 형태의 설계도뿐만 아니라 각종 도면과 스케치, 금전출납부 등이 나왔다. 86년 전 보화각이 설립된 역사를 단계별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동시에 대중에게 수집가로서 잘 알려진 전형필이라는 인물의 기획자이자 총감독으로서의 면모를 살피게 하는 유물들이다. 전형필은 당시 각 분야의 최고 실력자들을 모아 보화각을 세상에 만들었다. 설계 감독은 건축가 박길룡(1898~1943)의 건축사무소에, 건축 시공과 전기설비 등은 모두 경험이 많은 업체들을 따로 선정해 공사를 나눠 맡겼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서화 구입 내역 등을 기록한 ‘일기대장’. 간송미술관 제공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전형필이 남긴 전시실 진열장 스케치와 건설 공사와 인건비, 유물 구입 등 각종 지출 내용을 기록한 장부인 ‘일기대장’이다. 자신의 미술관을 세우겠다는 전형필의 꿈은 구체적이고도 면밀했다. 보화각 설립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그는 다양한 경로로 문화유산을 수집하는 한편, 직접 진열장 디자인을 조사하고 연구했다. 국내외 미술관을 돌며 진열장 디자인을 기록한 스케치는 모양과 구조뿐만 아니라 여닫이 장치 같은 기능까지 꼼꼼히 표시되어 있다.

이렇게 손길과 손결이 느껴지는 기록들은 전형필이 꿈을 그림으로, 다시 그림을 현실로 실현해 나가며 1938년을 얼마나 밀도 높게 보냈는지 가늠하게 한다. 전시에는 계단실 마감재를 선택하기 위해 받아 본 이탈리아산 대리석 견본들도 나와 있다. 2층 전시실로 가는 대리석 계단을 오르다 보면, 각기 무늬가 다른 그 견본들을 나란히 늘어놓고 선택을 고민했을 30대 초반 청년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국권을 잃은 시기에 국외로 반출될 뻔한 숱한 문화유산들을 붙잡고, 그에 마땅히 어울리는 아름답고 안전한 집을 지어 영원히 지켜주고자 했던 마음이 느껴진다. 안목과 재력만 있어선 불가능한 일이다. 시간과 노력과 열정을 다 쏟아붓는 것이 사랑이라면, 보화각은 사랑이 영원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손에서 탄생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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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의 품 좁히지 않는 복원

간송미술관 보화각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건립 당시 자료. 계단실 마감재 선정 과정에서 활용된 이탈리아산 천연 대리석 견본이다. 간송미술관 제공

2층 전시실에 나온 그림과 글씨 역시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간송 컬렉션 초기의 수집품이다. 그중 자단목 진열장에 나와 있는 안중식(1861~1919)의 수묵화 ‘추림책장’(가을 숲으로 지팡이를 짚고 나서다)은 가을 숲의 산뜻한 공기가 밀려드는 듯한 수묵화로, 간송미술관과 보화각을 만들고 지켜온 이들의 마음을 그려보게 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 속에는 단출한 차림새를 한 인물이 숲길에 서서 건너편 산을 바라보고 있다. 한쪽 팔을 쭉 뻗어 멀찍이 지팡이를 내짚은 것을 보면, 큰 보폭으로 걸어가다 문득 멈춰선 참인 듯하다. 햇빛에 아침 안개가 걷히며 산봉우리와 그 사이로 흐르는 폭포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림 속 인물은 그의 앞에 펼쳐진 길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렇게 완전히 멈추었기에, 다음 순간 그는 가던 대로 움직여지는 관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나아갈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드라마 ‘수사반장 1958’이 호응을 얻고 있다는 소식과 1958년 문을 연 대한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같은 날 접했다. 시대물은 흥행에 성공하지만 진짜 옛 시대의 것은 존재하기에도 벅찬 듯하다. 오늘날 우리 문화는 고증에 열광하고 복원을 반기면서도, 옛것들이 오롯이 담길 수 있는 틀인 오래된 공간을 지키는 노력에는 인색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역사적인 의미가 큰 건축들이 어디의 터라는 팻말만 남기고 사라지거나, 외관만 남기고 개축되는 사례에는 오래된 것은 새 쓸모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리의 예단이 담겨 있다. 그래서 본래 모습을 살리면서도 구석구석 오늘날의 필요에 부응하는 노력을 채워 넣은 간송미술관 보화각은 원형이 지닌 품을 좁히지 않는 복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간송미술관 보화각의 새 전시를 둘러보며 든 생각은, 공간을 지키는 힘은 결국 공간을 만드는 힘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가치를 지키기 위해 더 좋은 방법이 무엇일지, 지금 가능한 고민을 아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문화유산을 보전하는 가장 효율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문화유산 칼럼니스트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유산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유산을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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