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도 결핍이 있다…우울·비만·폰 중독에 좌절한 초능력자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불면증·비만 현대인 질병 탓에 무능력해진 초능력 가족
트라우마 고리로 사기단 접근…거짓·진실 오가는 구원서사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은 판타지 로맨스 가족 드라마이다. ‘스카이 캐슬’을 연출한 조현탁 피디 작품으로, 주화미 작가의 독창적인 극본이 호기심을 자아낸다. 독특한 설정의 캐릭터들이 굉장한 매력을 발산한다. 천우희, 장기용, 고두심, 수현, 박소이, 김금순 등의 호연이 빚어낸 본 적 없는 캐릭터들은 저마다 오롯한 주체성을 보여준다.
판타지와 현실의 절묘한 조화
드라마에는 초능력 가족이 등장한다. ‘인크레더블’ ‘무빙’ ‘힘쎈여자 강남순’ 같은 히어로물인가 싶겠지만, 제목이 말해주듯 히어로는 아니다. 드라마는 이들의 특별한 능력과 활약에 주목하지 않고, 결핍에 주목한다. 이들의 초능력은 흔한 현대인의 질병 때문에 사라졌다. 집안의 기둥인 복만흠(고두심)은 예지몽을 꾼다. 공연히 예지 능력을 이용당하고 희생되었던 선조들의 역사를 알기에 조용히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불면증에 걸려 통 꿈을 꾸지 못한다. 큰딸 복동희(수현)는 하늘을 나는 능력이 있었다. 런웨이를 나는 듯한 워킹의 슈퍼모델이었지만, 비만인이 되어 날지 못한다. 아들 복귀주(장기용)는 행복한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워프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지독한 우울증에 빠져 행복한 기억을 죄다 잃고, 능력도 상실했다. 복귀주의 딸 복이나(박소이)는 이제 13살이다. 눈으로 마음을 읽는 독심술을 지녔지만, 스마트폰 중독이라 사람들과 눈을 맞추지 않고 살아간다. 자신의 출생이 불행의 시작이라 믿는 복이나는 아직 가족들에게 능력을 말하지 않았다.
신선하고 놀라운 발상이다. 이들의 초능력은 판타지의 영역이지만, 이들의 결핍과 곤경은 대단히 현실적이다. 판타지와 현실감이 맞물려 빚어내는 (부)조화가 시청자를 강하게 잡아끈다. 복만흠은 초조하다. 예지 능력이 떨어져 재정 상태가 최악인 것도 그렇지만, 가족들이 모두 자기다움을 잃었기 때문이다. 복씨 집안의 자손들은 대대로 특별한 능력을 지녀왔고, 이를 따로 기록·보관하며 계승·발전시켜왔다. 가문의 혈통이 이대로 끊기면 안 되는데, 하나뿐인 손주는 13살이 되도록 능력이 나타나질 않으니 진짜 핏줄인지도 의심스럽다. 그러니 복동희의 결혼이나 복귀주의 재혼에 목이 빠질 지경이다. 먼저 결혼하는 자식에게 수십억원짜리 건물 소유권을 결혼 선물로 내걸었다. 이런 복만흠의 모습은 여느 가족 드라마에서 가족의 미래를 걱정하며 자식 혼사를 서두르는 부자 노인의 욕망과 조건을 고루 갖추었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은 복만흠을 중심에 둔 전통적인 가족 드라마의 외양을 띠면서, 인물 하나하나의 설정에 오묘한 사연을 담으며, 로맨스와 성장과 구원의 서사를 엮는다.
탁월한 트라우마 묘사
드라마에는 두개의 트라우마가 등장한다. 도다해(천우희)는 고등학교 화재 현장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그는 가스 불을 무서워해 끄지 못하고, 화재 경보가 울리면 공황으로 꼼짝하지 못한다. 이는 비교적 평이한 트라우마의 묘사이다. 복귀주의 트라우마는 더 끔찍하고 생생하며 구체적이다. 처음 타임워프 능력을 알게 된 어린 시절에, 그가 대왕 잉어를 뽑는 환희의 순간에 다른 사람은 슬픈 사고를 겪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그 시간으로 돌아가도 아무도 도울 수 없음에 낙담한다. 과거에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기에, 그저 행복한 시간으로 돌아가 몇번이고 기쁨을 누리는 개인적인 만족으로 초능력을 활용하며 살았다. 하지만 공익적 심성과 미안함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는 소방관이 되었다. 그런데 복이나가 태어난 날, 인근 고등학교에 화재 사고가 났다. 자신과 근무를 바꾸어주었던 선배 소방관이 순직했다. 복이나가 태어난 가장 기쁜 날이기에, 그는 몇번이고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병실을 빠져나와 화재 현장에 갈 수 있었지만, 역시 아무도 구할 수 없다. 그 뒤로 그는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자꾸만 그 시간대로 소환되었다. 소방관을 그만두고, 복이나가 7살이 되도록, 그는 그 시간을 반복해서 추체험(이전 체험을 다시 체험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한다. 피티에스디(PTSD),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 에 대한 기막힌 묘사이다.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 같은 재난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 중에는 왜 구할 수 없었는지 끊임없이 자책하면서 수년 동안 악몽 같은 그 시간을 사는 사람들이 꽤 있다. 현실에서의 삶이 망가지고 가정과 직장 생활이 엉망이 되어도 그 시간과 현장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복귀주는 아내와 이나를 두고도 계속해서 그 참사의 현장으로 소환되어 갔다가 역시 아무도 구하지 못하는 절망을 추체험하고 돌아왔다. 망가진 현생은 마침내 아내에게도 전이되었다. 아내는 “오늘도 당신이 사라졌다 돌아오면 나는 없을 것”이란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처참하게 사고가 난 차 안으로 돌아온 복귀주는 더 깊은 우울과 회한과 자책으로 빠져든다. 이제는 돌아가고픈 과거의 시간도 없다. 그에겐 살아남은 자로 느끼는 죄지은 느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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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통속, 진실과 거짓
드라마는 절묘한 이중의 덧대기를 한다. 초능력의 판타지와 현대인의 질병이라는 현실감을 버무리듯, 주인공의 로맨스에도 이중의 코드를 깐다. 가장 운명적인 ‘생명의 은인’이라는 구원의 코드와, 가장 통속적인 ‘사기 결혼’의 코드를 동시에 구사한다. 두 사람은 분명 ‘생명의 은인’으로 만났다. 첫 회의 도입부에 바다로 뛰어들어 파도에 휩쓸리는 복귀주를 도다해가 구한다. 하지만 곧 도다해가 복만흠에게 접근하는 것을 그리고, 심지어 첫 회의 마지막에는 도다해가 결혼사기단의 일원임을 드러낸다.
드라마는 ‘생명의 은인’이 상호적임을 밝힌다. 도다해가 복귀주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있었고, 복귀주가 그 사람을 닮았다”고 말한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도다해가 남자에게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닮았다고 말하는 것은 두번의 사기 결혼에서도 써먹은 ‘작업 멘트’다. 하지만 이 말은 드라마 전체의 거대한 복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도다해가 ‘우리가 손을 잡았었다’고 말할 때, 복귀주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가만히 눈을 감으니 도다해가 말한 시간으로 타임워프 해서 간다. 화재 경보가 울리는 현장에서 트라우마로 떨고 있는 도다해를 발견하고 복귀주가 손을 잡는다. 복귀주로서는 처음으로 과거의 시간에서 누군가를 돕는 사건이다.(이 장면 자체가 이미 상호 구원이 이루어짐을 암시한다. 복귀주는 누군가를 도움으로써 자신의 절망에서 벗어나고 능력이 살아난다.) 드라마는 이후 미래에서 온 복귀주가 도다해에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여준다. 시청자라면 복귀주의 타임워프 능력이 조상들의 사례처럼 도다해와의 만남을 통해 진화하여,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고등학생 도다해를 정말로 구하게 되는 서사로 나아가길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드라마는 4회 만에 숭고한 서사의 결말을 노출한다. 그것도 사기의 소재로. 결혼사기단의 리더 백일홍(김금순)은 도다해에게 혼인신고서를 받아내라는 독촉과 함께 고등학교 화재 사건을 써먹으라고 종용한다.
굉장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로맨스 장르에서 가장 마지막에 밝혀질 고귀한 비밀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기의 재료로 써먹으려 하다니! 여기서 진실과 거짓에 대한 드라마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첫째, 진실과 거짓은 완벽하게 분리된 것이 아니라, 암시, 확신, 수행, 이끌림 등을 통해 변천된다. 복귀주는 손을 잡았다는 도다해의 말이 거짓이라 생각했지만, 그 말을 곱씹는 중에 정말로 과거의 시간대로 훅 들어가서 그의 손을 잡는다. 또는 당신이 나에게 혼인신고서를 주었다는 말에 정말 사랑하게 되는지 보자면서 복귀주는 냅다 키스해버린다. 키스라는 수행을 통해 사랑이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생성되는 법이다. 피암시성이나 가스라이팅의 기전도 이러하다. 진실과 거짓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며 상호 침투한다.
둘째, 거짓말하는 사람도 진실할 수 있으며, 심지어 그것이 진실임을 모를 수가 있다. 도다해는 사기꾼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진실을 말할 수 있다. 백일홍은 “사기 결혼도 결혼이며, 결혼에는 진정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도다해의 의도는 사기지만, 도다해가 복이나를 보고 자신의 어린 시절 고독을 느끼는 것은 진실이다. 그래서 독심술이 있는 복이나가 도다해의 돈 욕심을 간파하면서도, 가족에게도 열지 않던 마음을 연다.
세상에는 거짓과 진실을 넘어서는 차원이 존재한다. 도다해는 복귀주에게 꽃다발을 받았다며 “활짝 핀 꽃을 주는 것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며 낭만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맥락은 허접하다. 도다해에게 꽃다발을 주었다는 말을 믿지 못하던 복귀주가 “활짝 피어서 오늘만 파는, 만원에 떨이인” 트럭에서 파는 꽃을 집어 든 채 타임워프 해서, 도다해를 마주친다. 복귀주는 절대 꽃을 주지 않으리라 마음먹지만, 갑자기 온 오토바이를 피하느라 꽃을 주게 된다. 도다해에겐 아름다운 로맨스가 복귀주에겐 남루한 현실이었고, 둘 다 진실일 수 있다. 도다해가 사기를 치기 위해 고등학교 화재 현장에서 복귀주가 구해주었다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도 모르는 진실일 수 있다. 도다해도 이들 가족과의 오묘한 인연을 다 모른다. 왜 복만흠이 도다해의 꿈만 꾸는지, 왜 복귀주는 도다해의 시간으로만 돌아가는지, 도다해만 알록달록한지, 도다해에게만 닿는지, 도다해만 도울 수 있는지, 도다해도 알지 못한다. 사기꾼도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며, 앎 너머의 힘을 흔히 운명이라 부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에 뛰어들어 복귀주를 구할 때의 도다해는 진심이었다. 운명과 진심 앞에 사기는 아주 작은 티끌처럼 느껴진다.
앞으로 드라마가 어떻게 상호 구원의 서사를 완성할지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독창적인 스타일과 철학이 살아 있는 드라마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남은 한편 한편이 기대된다.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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