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의 아버지들'을 잊으라 ...미국의 '반민주적 헌법'이 트럼프를 낳았다

조태성 2024. 5. 1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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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렛 하버드 교수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트럼프 대선불복과 국회의사당 난입사건 뒤
민주주의 위기와 공화당의 극우화 원인 탐구
건국헌법 신화 해체 뒤 '단순 다수결' 개헌 주장
2021년 1월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대선 불복을 외치며 워싱턴의 국회의사당으로 몰려가 폭력 사태를 일으켰다. 워싱턴 = AP 연합뉴스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승리하자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썼다. 2021년 트럼프의 '대선 결과 불복' 주장에 맞춰 극우세력이 국회의사당을 점령하는 '쿠데타 미수' 사태가 벌어졌으니 또 한 번 이런 책을 쓸 법하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 두 사람이 함께 쓴 이 책은, 결론부터 간단히 말하자면 '단순 다수결 제도 도입을 핵심으로 하는 미국판 개헌론'이다. 민주주의 한다면서 실은 인민 다수의 지배를 저지하기 위해 교묘하게 고안해둔 각종 제도와 관행이 미국이 앓고 있는 민주주의 동맥경화의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트럼프가 드러낸 미국 헌법의 문제점

쿠데타와 반민주주의, 탄핵 모두 겪어본 데다, 매 정권마다 개헌론이 어떻게 무산되는지 지켜본 우리 입장에서는 좀 신기한 풍경이긴 하다. 민주주의의 원조쯤 되는, 우리가 늘 부러워하던 미국이 노무현 정부 시절 대선 패배에 승복하지 않았던 보수로 인해 논의가 촉발된 '정치 불능과 개헌 문제'를 이제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게 말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반성과 고민을 심화시키고 있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를 함께 쓴 스티븐 레비츠키(사진 왼쪽), 대니얼 지블렛 하버드대 교수. ©Stephanie Mitchell

미국에서 개헌은 한국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봐야 한다. 미국독립혁명과 연결된, 건국의 아버지들이 만든 연방헌법에 대한 믿음이 강고해서 그렇다. 그래서 저자들은 건국의 아버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개헌 발언들을 일일이 길어올린다. "현 세대가 미래 세대를 옥죄지 않기 위해서는 20년에 한 번씩 정도는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던 토머스 제퍼슨의 주장 같은 것들 말이다.

건국헌법이 실은 '반민주적'이라 자백도 한다. 미국 헌법의 핵심 중 하나는 '의회의 다수결을 어떻게 무력화할 것이냐', '민주주의를 어떻게 봉쇄할 것이냐'다. 대법관 종신제, 대법원의 사법심사 권한, 연방주의 원칙, 상원의 필리버스터, 복잡한 선거인단 제도로 뽑는 대통령 선거 등이 그렇다.


미국의 건국헌법은 허점투성이 절충물

마지막으로 건국헌법이 얼렁뚱땅 만들어졌다는 점도 세세히 드러낸다. "미국인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헌법은 신성한 문헌이며 그래서 존경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배운다. (중략) 공화국이 효율적으로 기능하도록 만들기 위해 치밀하게 구성한 청사진의 일부라고 믿는다." 하지만 미국 헌법은 신성하지도, 치밀하지도 않다. 난립하는 수많은 주장을 얼기설기 엮은, 차선 중의 차선이나 차악 중의 차악들을 모아둔 절충의 결과물이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어크로스 발행·440쪽·2만2,000원

저자들의 이런 노력이 좀 짠하기도 하다. 건국헌법에 대한 자국민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까 봐 '우리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니까'라는 톤의 설명, 해설을 줄줄 이어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란 게 너무나 당연한 지금과 달리, 건국헌법 제정 당시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지나치게 급진적이었기에 여러 안전판이 필요했었다는 나름의 정당화도 곁들였다. 덕분에 독자들은 미국 헌법의 신화에서 깨어날 수 있고, 10여 가지 정도로 정리해둔 미국 헌법의 반민주적 요소에 대해 고민해볼 시간을 갖게 됐지만.


보수는 극우와 단호히 결별해야 한다

한국적 맥락에서 눈길을 끄는 건 '공화당은 어쩌다 트럼프와 그의 일당들에게 놀아나는 기괴한 정당이 되었느냐'는 부분이다. 저자들은 정치 성향은 달라도 민주주의자인 이상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 폭력적 행위에 대한 단호한 반대, 이 두 가지만은 절대 옹호해야 한다 본다.

하지만 공화당은 뜨뜻미지근했다. 거리의 극우파들이 내세우는 기괴한 국가정체성, 헌법 놀음을 두고 "그래도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식으로 싸고돌면서 사실상 승인해 버렸다. 이유는 단 하나. "반민주적 극단주의를 묵인하는 이유는 그게 가장 쉽게 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아무 말 대잔치 곁에서 슬쩍 편히 묻어가려는 비겁한 행태다.

딕 체니 부통령의 딸 리즈 체니. 보수 성향의 공화당 의원이지만 트럼프가 촉발한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을 강력히 비판했고, 이 사안을 다룰 의회의 특별조사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정치적 불이익을 겪었으나 저자들은 지금 공화당에 필요한 것은 리즈 체니처럼 '극우와 결별을 선언하는 단호한 보수'라 주장한다. 워싱턴=AP 연합뉴스

하지만 이는 장기적으로 공화당을 소수 극우파들의 "포획에 취약한 상태로 전락"시켰다. 쳐내지 못하니 되레 그들에게 흔들린다. 공화당은 극우파에게 찍힐까 봐 아무것도 못 하는 당이 됐다. 저자들은 이렇게 포획된 공화당을 두고 "헌법적으로 강경한 태도"라 묘사해 뒀는데, 읽다 보면 여전히 색깔론만 붙들고 있는, 정치적 경쟁자를 타도 대상으로만 여기는, 아스팔트 극우나 유튜브 극우와 단호하게 선을 긋지 못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와 헌법 가치를 그저 강변만 하는 한국 보수와 겹쳐 보인다.

저자들은 대신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함께 우드로 윌슨, 린든 존슨 3명을 개혁적 보수주의자로 재조명하는데, 이젠 좀 식상한 느낌까지 있는 '한국 보수의 위기'에 관심 있다면 참조해 볼 대목이다.

조태성 선임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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