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용의 부활에 부메랑 맞은 한국 축구 [경기장의 안과 밖]
동남아시아는 축구 변방이다. 월드컵 출전 역사는 1938년 네덜란드령 동인도(현 인도네시아)가 본선에 오른 것이 유일하다. 오랜 시간 주류 무대와 동떨어진 지역이지만 시장성은 매우 높은 곳이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10개 회원국 총인구는 약 6억7000만명, 미국의 2배에 달하고 전 세계 인구의 8%가 넘는다. 인도네시아의 영향력은 특히 강력하다. 인구는 2억7000만명으로 인도·중국·미국에 이은 4위의 대국이다. 명목 GDP도 아세안에서 홀로 1조 달러가 넘는다. 아세안의 유일한 G20 회원국이라는 점도 그들의 자부심을 한층 높인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축구는 국가의 잠재력에 비례하는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동남아 최고 인기 종목인 축구를 얘기할 때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말이 줄어든다. 타이(태국)와 말레이시아가 전통적인 동남아 축구 최강자의 자리를 두고 다퉜으며, 최근에는 ‘박항서 매직’을 앞세운 베트남, 유럽식 시스템을 도입한 싱가포르의 약진까지 지켜봐야 했다. 인도네시아는 ‘동남아 월드컵’으로 불리는 미쓰비시컵(전 스즈키컵)에서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다.
그랬던 인도네시아가 최근 심상찮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2019년 12월 신태용 감독 부임 이후 새 역사를 쓰고 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을 끝으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난 신태용 감독은 잠시 휴식을 취하다 2020년 인도네시아의 러브콜에 응했다. 인도네시아 A 대표팀과 23세 이하(U-23) 대표팀, 20세 이하(U-20) 대표팀을 총괄하는 사령탑에 올랐다.
신태용 감독 부임 후 인도네시아 축구는 극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첫 시험대인 2021년 스즈키컵에서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 타이에 패해 여섯 번째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지만, 조별리그와 준결승에서 베트남과 싱가포르를 차례로 꺾으며 신바람을 냈다. 부임 당시 FIFA 랭킹 175위였던 인도네시아는 130위권까지 뛰어올랐다.
올해 들어 신태용 감독의 승부사 기질이 폭발했다. 아시안컵(1월)과 U-23 아시안컵(4월)에서 인도네시아는 새로운 고지에 올랐다. 아시안컵 조별리그에서는 베트남을 꺾고 사상 처음으로 토너먼트(16강)에 진출했다. U-23 아시안컵은 ‘신태용 극장’의 하이라이트였다.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석연찮은 판정 끝에 개최국 카타르에 패하자 “코미디 같은 판정이다. FIFA에 제소하겠다”라며 반발했다. 감독의 말은 선수들에게 ‘실력이 모자라서 진 것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심어주었다. 인도네시아는 이후 오스트레일리아(호주)와 요르단을 연파하며 8강에 진출했다.
공교롭게도 8강 상대는 한국이었다. 신태용 감독은 경기 전에 “한국은 조국이지만 지금 내가 입은 유니폼에는 인도네시아 엠블럼이 있다.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각오를 밝혔다. 인도네시아는 조별리그의 기세를 이어 경기 초반부터 한국을 몰아쳤다. 전반 스코어는 2-1로 인도네시아의 리드였다. 후반 들어 한국 공격수 이영준의 퇴장으로 수적 우세까지 점했다. 정상빈이 동점골을 터뜨리며 승부는 연장전으로 이어졌지만, 투지와 조직력에서 한국보다 더 잘 준비된 모습이었다. 기술에서도 모자람이 없었다. 인도네시아는 결국 승부차기에서 12번 키커까지 가는 접전 끝에 골키퍼 에르난도 아리의 선방으로 승리를 챙겼다. 인도네시아가 이 대회에서 처음 4강에 진출하는 역사를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동시에 한국에는 참극이었다. 1988년부터 시작된 올림픽 10회 연속 본선 진출의 꿈이 이 경기로 무산됐다.
신태용 감독은 4년 남짓 인도네시아에서 과감한 리빌딩을 진행했다. 부임 직후 A 대표팀에 23세 이하 선수들을 중용하며 젊은 팀으로 거듭나게 했다. 지난 1월 아시안컵에서 16강 진출을 일군 주력 선수들도 23세 이하 멤버였다. 과거 거스 히딩크 감독이 한국을 맡았을 때처럼 자신의 지도 방식을 빠르게 흡수하고 따를 수 있는 선수 위주로 재편한 것이다.
취약 포지션에는 유럽에서 뛰고 있는 인도네시아계 선수들을 대거 불러들였다. 신태용 감독은 네덜란드에 있는 인도네시아계 선수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며 귀화 작업을 펼쳤다. U-23 아시안컵에서 한국을 상대로 멀티골을 넣은 라파엘 스트라위크(덴하흐)가 대표 격이다. 식민지 시절 네덜란드로 건너간 인도네시아 후손 3세, 4세들이 수준급 선수로 활약 중인데, 이들을 인도네시아 대표팀으로 끌어들이는 용광로 프로젝트로 대표팀 전력을 업그레이드했다.
신태용 성공 이끈 ‘회장님’의 전폭 지지
이 프로젝트는 인도네시아 정재계 실력자인 에릭 토히르 축구협회장의 전폭 지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토히르 회장은 인도네시아 대기업 아스트라의 소유주 테디 토히르의 차남이다. 에릭 토히르는 미국에서 유학 뒤 귀국해 마하카 미디어 그룹을 설립하면서 성공한 기업인이 됐다. 조코 위도도(조코위) 정부 2기에서는 국영기업부 장관으로 정계에도 입성했다.
그가 스포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는 2013년이다. 유럽 축구 명가인 인터 밀란 지분 70%를 인수하며 구단주가 됐다. 축구 외에도 NBA(미국 프로농구), MLS(메이저리그 사커) 등 미국 스포츠 구단의 지분을 대거 사들였다. 지난해 2월에는 인도네시아 축구협회장이 됐다. 토히르 회장은 신태용 감독의 방향성을 지지하며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주요 대회마다 동행했다. 이번 U-23 아시안컵에서도 그는 매 경기 방문하며 선수들의 사기 진작을 이끌었다. 신태용 감독이 주요 대회에서 잇달아 토너먼트에 진출하자 토히르 회장은 일찌감치 재계약 의사를 타진하며 2027년까지 함께하겠다고 발표했다.
베트남의 박항서(2017~2023), 인도네시아의 신태용 감독이 연달아 동남아 축구의 기적을 이끌자 한국인 지도자의 위상은 다시 공고해지는 분위기다. 말레이시아의 김판곤 감독도 최근 월드컵 예선과 아시안컵의 선전을 인정받아 2년 재계약에 성공했다. 박항서 감독이 물러난 뒤 거짓말처럼 부진에 빠진 베트남은 필리프 트루시에 감독을 경질했다. 후임으로 다시 한국인 감독을 선임해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 김상식 전 전북 현대 감독과 계약 협상 중이다.
역설적으로 동남아에서 재기한 한국 지도자들은 잇달아 한국 축구를 향한 역습을 펼치고 있다. 박항서 감독은 일찌감치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선수들의 기술 수준은 한국, 일본 못지않다. 피지컬이나 승부 근성 등 나머지 요소를 채운다면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한국 지도자들이 나서서 약점을 채우자 아시아 주요 대회에서 동남아 국가들이 한국의 발목을 잡는 빈도가 잦아졌다. 오랫동안 명백해 보였던 동남아 축구와의 간격이 허물어지고 있다.
배진경 (〈온사이드〉 편집장) edito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