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담아내는 그런 가방은 없다 [주말을 여는 시]

하린 시인 2024. 5. 18.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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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천서봉의 ‘서봉氏의 가방’
젊은 시를 써야 한다는 압박
한번에 담아낼 수 없다면
쓸쓸하더라도 내게 맞는 가방을

서봉氏의 가방​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을 넣어야 한다,
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거리는
더 커다란 가방을 사주거나
사물을 차곡차곡 접어 넣는 인내를 가르쳤으나
바람이 불 때마다 기억은 집을 놓치고
어느 날, 가방을 뒤집어 보면
낡은 공허가 쏟아져, 서봉 氏는 잔돌처럼 쓸쓸해졌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가령 흐르는 물이나 한 떼의 구름 따위,
망상에 가득 찬 머리통을 담을 수 있는, 그러니까
서봉 氏와 서봉 氏의 바깥으로 규정된 실체를
통째로 넣고 다닐 만한 가방을 사러 다녔지만
노을 밑에 진열된 햇살은 너무 구체적이고
한정된 연민을 담아 팔고 있었다.

넣을 수 없는 것을 휴대하려는 관념과
찾는 것은 이미 분실한 시간
거기, 서봉 氏의 쓸쓸한 가죽 가방이 있다.
오래 노출된 서봉 氏는 풍화되거나 낡아가기 쉬워서
바람이나 빗속에선 늘 비린 살내가 풍겼다.
무겁고 질긴 관념을 담고 다니느라
서봉 氏의 몸은 자주 아프고
반쯤 벌어진 입은 늘 소문을 향해 슬프게 열려 있다.

천서봉

· 2005년 「작가세계」 데뷔
· 시집 「서봉氏의 가방」 등 다수
· 산문집 「있는 힘껏 당신」

「서봉氏의 가방」, 문학동네, 2011.

시인들이 꿈꾸는 그런 가방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사진=펙셀]

천서봉 시인의 첫 시집 「서봉氏의 가방」은 다른 젊은 시인의 첫 시집에서 느껴지는 톡톡 튀는 상상력과는 다른 면모가 있다. 그래서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시만 섭취하다가 울렁증에 빠지거나 너무 일방적인 입맛으로 시적 경험이 한정된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시집이다.

그렇다고 이 시집이 기성시인의 시들처럼 완숙된 시적 경지를 보여주거나 전통 서정시의 패턴을 보여준다는 뜻도 아니다. 젊음의 색깔에도 여러 색깔이 있듯이 다른 젊은 색깔을 보여주고 있다는 뜻이다.

천서봉 시인도 감각적인 언어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감각적 언어 감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시는 뭣 땀시 쓴댜 ―"라는 단골 백반집 아주머니(시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질문 앞에 두꺼운 겉포장이 의미 없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인식한 것이 "거짓말하던 서정"이다.

표제작 '서봉氏의 가방'은 그러한 고민의 흔적으로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을 넣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던 시인은 "어느 날, 가방을 뒤집어" 보고 "낡은 공허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넣을 수 없는 것을 휴대하려는 관념" "무겁고 질긴 관념"은 젊은 시인들이 갖는 '젊은 시'를 써야 한다는 '압박'에 해당한다.

시인들은 흔히 "흐르는 물이나 한 떼의 구름 따위,/망상에 가득 찬 머리통을 담을 수 있는" 자신과 자신의 "바깥으로 규정된 실체를/통째로 넣고 다닐 만한 가방"을 찾는다. 그러나 그런 가방은 이 세상에 없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가방은 나만의 스타일로 디자인된 개별적인 단독자로서의 가방이다. 그래서 "서봉 氏의 쓸쓸한 가죽 가방"은 천서봉만의 스타일로 거듭난다.

천서봉 시인은 감각적인 이미지보다는 삶의 내면을 아련하게 인식하는 통찰의 시를 지향한다. 직관을 자연스럽게 이미지화하는 시작법, 이것이 천서봉만의 '가방'이다.

다음과 같은 시적 표현들에서 우리는 그런 일면을 만날 수 있다. "애야 모로 눕지 말거라. 관(棺)이 너무 넓구나." "조록조록 언 땅 녹이며 빗줄기 갈마들 때 무한정 어두운 술청으로 스며드는 아비와 그 아비들의 무수한 손톱에 낀 첩첩한 저녁 같은 거('뿌리 내리는 아버지')"

"절망을 만나러 가던 길 아니었으므로. 그런 날, /돌아오는 길은 끝을 확인할 수 없는 전전(戰戰)이었고/막다른 긍긍(兢兢)이었다." "숲이 어디까지 짙어질 수 있는지,/위험한 짐승들을 키우기에 불신은/또 얼마나 적당한 온도였는지 알지 못했다." "밤은 수없는 논리를 내게 던졌고 가등은/샴쌍둥이처럼 서서 하나의 뿌리에 관해 질문했다./뒷골목엔 또 다른 절망을 낳는 여자들/신음이 아무렇게나 길이 되고 있었다('불심검문(不審檢問)')"와 같은 표현은 통찰의 이미지화를 빼어나게 보여주는 예시다.

[사진=펙셀]

서봉氏의 가방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궁금한 독자들은 서봉氏의 가방을 저녁이나 밤에 열어보길 바란다. 저녁과 밤은 그가 좋아하는 시간의 주름이다. 그의 가방을 열면 카키색 어둠이 깔려 있는 거리에서 차분한 시선으로 주변을 응시하는 한 사나이가 보인다.

"희망누수탐지원 양지천막간판 시네마 천국 조은세상인테리어 미소치과의원 오뚜기문구 행복사진관 굿모닝빵집('입면도(立面圖)를 위한 에스키스')"이 있는, 우리가 사는 동네 사거리에서 "외등이 희미한 거리에 나가 시를('회전목마가 있는 묘지')" 쓰는 사나이,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는, 내밀한 깊이로 가득 찬 통찰의 사나이가 보일 것이다.

하린 시인 | 더스쿠프
poeth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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