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그만두고 농부가 됐다…‘40년 유기농 철학’ 깃든 그 집 달래장 [ESC]

박미향 기자 2024. 5. 18.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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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의 요즘 뭐 먹어
‘생명역동농법’…원혜덕·김준권 ‘평화나무농장’
화학비료 없이 땅 기운 모아…회원들 제철작물 공급
원혜덕씨가 만든 ‘달래무침’. 박미향 기자

레오가 활짝 웃는 표정을 지으며 달려왔다. 레오는 경기 포천 농부 원혜덕(68)씨 부부가 키우는 골든 리트리버다. 그가 운영하는 평화나무농장의 방문객들은 처음 보는 ‘웃는 개’에 놀란다. “웃는 게 아니에요. 입꼬리가 올라가서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지난달 찾은 평화나무농장에서 원씨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농장의 첫인상은 레오가 결정했다. 반려견은 주인의 품성을 닮기 마련이다.

평화나무농장은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에 있다. 원씨와 그의 남편 김준권(76)씨가 40여년 넘게 꾸려온 2㏊(2만㎡) 규모의 농장이다. 밀·보리·양파·고추·감자·토마토 등 각종 작물이 재배되는 농장에는 소 30마리와 염소 20여마리를 사육하는 축사도 있다. 비가림 비닐하우스 3개동에는 토마토 등이 자란다. 그 앞을 닭 10마리가 거닌다. 목가적인 풍경이다.

화려한 미식과 타협하지 않는

원씨가 차린 점심 밥상. 달래장, 된장찌개, 쑥국 등 소박한 밥상의 품격이 감동을 준다. 박미향 기자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한 가지(작물)가 나오면 오래 먹죠.” 원씨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매를 잡아끌어 데려간 곳엔 달래가 한창이었다. 그가 호미로 달래를 캐기 시작했다. 달래에는 촉촉한 흙이 묻어있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낸 땅의 기운이 오롯이 담뿍 밴 달래다. “달래장 만들어서 김에 싸먹기도 하고요, 두부랑 해서 찌개로 해먹기도 하고요. 무쳐서도 먹어요. 도시(사람들)처럼 장을 보지 않아요. 쑥도 다 캐서 먹지요.” 이른 아침 쑥 뜯느라 손이 까맣게 되었다는 그가 레오처럼 유(U)자형 표정으로 바뀌었다. “달래 뿌리가 탱글탱글한 게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이날 그는 달래장, 달래무침, 된장찌개, 쑥국 등으로 점심상을 차렸다. 그가 만든 달래장의 달래는 자른 길이가 1㎝ 정도로 긴 편이었다. 양념이라고는 직접 짠 들기름, 집에서 담근 간장, 고춧가루가 다였다. 투박한 그릇에 담긴 밥상은 정직한 자연의 맛이었다. 추앙받는 화려한 미식과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는 농부의 철학이 오롯이 새겨진 거친 맛이었다. 제아무리 기술 좋은 유명 셰프라도 감히 넘볼 수 없는 품위였다. 자연의 생명력이 응축된 제철 식재료만이 선사하는 기품이 넘쳤다. 이들 부부가 그동안 매달려온 ‘생명역동농법’의 결과다.

원혜덕씨 부부가 키우는 개 ‘레오’. 박미향 기자
원혜덕(왼쪽)씨와 남편 김준권씨. 박미향 기자

‘생명역동농법’은 오스트리아 인지과학자이자 교육가인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가 죽기 1년 전 농부들을 대상으로 한 강좌에서 설파한 농법이다. 그의 생각에 찬성하는 이들이 이론을 발전시켜 지금에 이르렀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이 농법을 적용해서 농사를 짓는 이의 수는 적은 편이다. 슈타이너의 농법을 지지하는 영국의 농학자 로드 노스본조차도 책 ‘땅을 생각하다’에서 “대륙에서 15년 동안 작업 과정에서 고도로 개발되었으며 그 효과가 입증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지지자들 외엔 잘 아는 이들이 별로 없다”고 했다. 한국에선 그 수가 더더구나 적을 수밖에. 대략 20명 남짓이라고 한다.

핵심은 ‘땅에 대한 존중’이다. 자연에 깃든 우주의 법칙이나 해가 뜨고 달이 지는 자연의 주기를 기본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실제 농사에 적용되는 실천강령은 무엇일까. 자연의 리듬이 스민 땅을 황폐하게 하는 일체의 화학비료 사용을 금지한다. 달의 위치나 별자리로 파종 시기를 정한다. 자연 친화적인 농부의 삶과 윤리적인 동물 사육도 한 축이다. 원씨는 더 나아간다. “자연의 순환이나 질서에 맞춰 화학비료나 농약, 제초제를 안 쓰고 퇴비를 사용하는 건 기본이고요, 증폭제를 사용해 생명과 우주의 기운을 모으려 하죠.” 그는 다소 황당하게 들릴 수 있지만, 남편과 함께 실천해온 세월이 증명하고 있다고 했다. “눈에 확연히 보이는 효과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땅이 비옥해져요. 이미 유럽 여러 나라, 미국 등에서 실천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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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원혜덕씨가 평화나무농장에서 캔 달래와 원씨의 거친 손. 박미향 기자
평화나무농장 강의실에는 원경선 선생의 사진 등이 보관되어 있다. 박미향 기자

‘유기농 대부’ 원경선 뜻 이어받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화학비료를 이용한 농산물 대량 생산에만 집중했던 세계는 기후위기 등에 봉착하며 극한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생명역동농법’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유기농 운동이 태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가 말하는 9가지 증폭제란 무엇일까. 대표적인 증폭제가 ‘소똥 증폭제’다. 암소 똥을 암소 뿔에 가득 채워 넣고 가을에 땅에 묻는다. 6개월 뒤 꺼낸 소똥이 증폭제가 되는데, 땅에 뿌려 퇴비로 쓴다. 겨울을 이겨낸 생명력과 에너지가 소똥에 응축된다고 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떡갈나무, 캐모마일, 쐐기풀, 민들레 등이 재료가 되는 증폭제가 농장 비료로 사용된다.

이들 부부가 ‘생명역동농법’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1995년 정농회 연수에서 만난 프랑스 농부의 강의였다. 당시 땅의 소중함을 강조한 강의에 두 사람은 큰 감동을 받았다. 정농회는 한국 유기농의 대부이자 사회 운동가인 원경선(1913~2013) 선생이 1976년에 세운 농민 모임이다. 이들 부부의 실천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원씨는 원경선 선생의 넷째 딸이다. 2020년 정계를 은퇴한 5선 국회의원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가 그의 오빠다. 전남 고흥이 고향인 김씨는 18살에 원경선 선생이 꾸린 공동체 ‘풀무원농장’에 들어가, 원 선생의 철학을 지금껏 실천해오고 있다. 원씨와는 1981년 결혼했다. “제가 남편을 처음 본 게, 10살 때예요. 남편이 될지 상상도 못 했죠.” 원씨가 웃으며 말했다.

원혜덕씨 부부가 키우는 소들. 박미향 기자
달래를 캐고 있는 원혜덕씨. 박미향 기자

원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했다. 본래 농부가 될 생각은 없었다. 교사 일은 더없이 적성에 맞았다. “남편이 농사일을 같이하자며, 같이할 거면 결혼하고 아니면 안 한다는 거예요. 남편 생각은 선생님은 누구나 하려는 좋은 직업이지만, 농부는, 농업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고 의미 있는 일이니, 같이하자는 거였죠. 그러면서 교사 일 등을 실컷 하라며 10년을 기다린다고도 했어요.” 그는 7년 만에 함께했다. 지금은 둘째 아들 김진평(36)씨가 대를 이어 농사를 짓고 있다.

원씨는 자신의 삶을 타인들과 나눈다. 생산물을 꾸러미로 제공하는 ‘농업 지원 공동체’ 프로그램이다. 통상 꾸러미 사업은 월회비를 내면 매달 생산물을 배송해주는 일인데, 평화나무농장 회원의 절반 정도는 연초에 연회비(60만원)를 선금으로 보낸다. 농부가 지속적인 농사를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6년 전 대산농촌재단이 마련한 해외 연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시작한 일이다. 통밀빵, 산양유 요구르트, 토마토주스 등이 특히 인기가 많다.

요즘 그는 더 바쁘다. “찾아오시는 분이 많아졌어요. 저희가 하는 강연을 흥미로워하시는 분도 많고요.” 땅의 소중함을 아는 농부의 일상이 조금씩 세상을 바꾸고 있다.

포천/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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