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없는 아이들 고통·눈물, 그런 세계 만든 신을 거부하다

2024. 5. 18.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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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문학으로 본 21세기
1943년 ‘The Modern Library’가 출간한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본문 삽화. [사진 지식을만드는지식]
‘죄없는 아이의 눈물 한 방울’과 ‘세상 전부’. 이 중 어느 쪽이 더 무게가 나갈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이같은 도발적 질문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둘째 아들 이반이라는 인물을 매개로 ‘죄 없는 어린아이의 눈물’과 그 가치에 대해 설파한다. 이반은 지성의 대변인으로 등장하지만 끝내 분열하고 파멸한다.

어려서부터 학문적 재능이 뛰어났던 이반은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무신론자다. 사상적으로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는 인물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공들여 썼다고 알려진 5장의 주요 화자이며, 작품 내에서 저 유명한 대서사시 ‘대심문관’의 저자이기도 하다. 대서사시가 시작되기 전 4장에서 이반은 부모에게 잔인하게 학대를 당한 다섯 살 소녀의 슬픈 사연을 전한다. 세상에 그런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번민하던 이반은 신이 자비롭고 정의롭다는 개념을 의심한다. 그는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이 만든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라고 선언한다. 이 세계가 죄 없는 어린아이들의 고통과 눈물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반은 수도사인 동생 알료사에게 신에 대한 ‘반역’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린 딸 잔인한 학대, 신의 자비·정의 의심

“지상의 모든 종교는 이 소망 위에 서 있고, 나도 믿음을 가진 사람이야. (…) 모든 인간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은 그 고통으로써 영원한 조화를 사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어째서 아이들까지 거기 껴야 한다는 거냐 (…) 어째서 아이들마저 고통을 받아야 했고, 어째서 아이들마저 고통이란 대가를 치르고 조화를 사야 한다는 거냐? 어째서 아이들마저 재료로 전락해서, 누군가가 누릴 미래의 조화를 위해 밑거름이 되어야 한단 말이냐?”

자신은 3차원적 인간이기 때문에 4차원의 세계에 속하는 신이나 저 세계에 속한 것은 볼 수도 증명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으니 그냥 받아들이지만, 이 모든 것이 신이 계획한 ‘마지막 날’에 있게 될 영원한 조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그러한 조화는 죄 없는 어린아이의 눈물 한 방울만 한 가치도 없기에, 신이 준비한 세계로 가는 “입장권을 서둘러 반환한다”는 것이다.

1943년 ‘The Modern Library’가 출간한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본문 삽화. [사진 지식을만드는지식]
강렬하고 울림있는 항변이다. 아이들은 눈물보다 웃음을, 두려움보다 설렘을, 분노보다 이해를, 포기보다 용기를 먼저 배워야 한다. 절대적 사랑의 기억은 그 사람의 몸에 각인돼 힘겨운 인생을 살아내고 검은 유혹의 손길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준다.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속에서 죽음을 앞둔 조시마 장로의 마지막 설교를 통해 추억과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좋은 추억, 특히 어린 시절 가족 간의 아름다운 추억만큼 귀하고 강력하며 아이의 앞날에 유익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마음속에 아름다운 추억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사람은 악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조시마 장로는 작품 속에서 정신적인 지주에 해당한다. 죽기 전에 한 이 설교가 중심 챕터인 6장 전체를 차지하고, 그가 하는 말이 곧 도스토옙스키가 후대인들에게 전달하고픈 유언으로 해석된다.

사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출생의 비밀, 치정, 살인, 복수 등의 이야기가 난무한다.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저열한 욕망의 화신이다. 부성애의 가치보다 물욕과 육욕을 채우는데 몰두한다. 두 번의 결혼을 통해 네 아들을 얻었다. 첫 아내에게서 태어난 장남 드미트리가 아내의 유산을 물려받자 온갖 수단을 동원해 가로채기에 나서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심지어 아버지는 스물두 살의 그루셴카를 두고 장남과 피 튀기게 싸운다. 드미트리는 귀족 여인 카테리나와 약혼을 했지만 그루셴카에게 가기 위해 약혼녀를 동생 이반에게 양보하려 한다. 둘째 아들 이반은 카테리나를 사랑하고 카테리나도 내심 이반을 사랑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영문판 속표지. [사진 지식을만드는지식]
표도르에게는 혼외 아들도 있다. 마을에 떠도는 백치 여인을 범해서 얻은 것으로 추정되는 스메르댜코프다. 스메르댜코프는 “신과 불멸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이반의 사상에 영향 받아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살해한다. 하지만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엉뚱하게도 장남 드미트리였다. 그루셴카를 사이에 두고 표도르와 치정 드라마를 찍던 그가 평소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말을 자주 하고 다녔던 것이 결정적 사유가 됐다. 스메르댜코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아버지를 살해한 죄를 뒤집어쓴 드미트리는 고통 속에서 시베리아로 떠난다.

스토리 라인만 보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명작으로 승화됐을까. 해답은 플롯이 아니라 지극히 통속적이고 세속적인 상황에 놓인 주인공들을 통해 처절할 정도로 고통스럽고 심오한 인간과 욕망의 본질을 해부하는 데 있다. 이런 막장 가족 안에서도 막내아들 알료샤는 믿음이 강했던 어머니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밑거름 삼아 세상을 구원할 것임이 암시된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적대적, 차별적 환경에 놓여 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한국에서 노키즈존 식당·카페가 늘어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한국 사회가 저출산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이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 피곤해지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정부와 저출산 대책 기관들은 ‘대한민국이 1호 인구소멸 국가가 될지도 모른다’라며 연일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하지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걱정하기보다는 이미 세상에 나온 아이들 즉 내 옆에, 당신 곁에, 우리 앞에 있는 아이들을 살피는 게 먼저다.

미국 “매일 어린이날, 따로 정하지 않아”

실제로 절대적 사랑과 지지를 받아야 할 부모로부터 씻을 수 없는 영혼의 상처를 입는 위기의 아이들이 여전히 많다. ‘2022년 아동학대 연차보고서’에 의하면 줄어드는 출산율과 반대로 아동학대 건수는 해마다 늘어난다. 일례로 ‘정인이 사건’이 발생한 2020년 아동학대 신고접수는 총 3만8929건이었지만 2022년 아동학대 신고접수는 4만6103건으로 증가했다. 하루 평균 127건의 아동학대가 발생하고 있으며, 한 시간에 5.3명의 아이들이 불안과 공포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더 무서운 사실은 아동학대의 80%가 부모로부터 이뤄진다는 것이다.

한 방울의 사랑일지언정 아이들은 매일매일 사랑을 먹고 자라야 한다. 초유가 일정 기간 신생아를 온갖 세균으로부터 지켜주듯, 유년시절에 받았던 크고 작은 사랑의 기억은 복잡하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직면하게 될 온갖 위험과 유혹으로부터, 한 사람을 평생토록 온전하게 지켜내게 하는 정신적인 초유가 된다. 세 아이를 키워 낸 엄마로서, 필자가 경험으로 절절이 느낀 삶의 지혜다. 결국 사랑이다.

우리나라보다 두 배 높은 출산율을 보이는 미국은 어린이날이 따로 없다. 유학 당시 지인에게 ‘어린이날이 언제냐?’라고 물으니 “Everyday is Children’s Day!”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매일매일이 어린이날이기 때문에 굳이 어린이날을 지정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김정아 번역작가·CEO. 노문학 박사. 낮에는 패션회사 스페이스 눌의 대표로, 새벽에는 도스토옙스키 번역가로 일한다.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단일 번역가 번역이라는 세계 최초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죄와 벌』 『백치』 『악령』 완역본이 출간됐고, 현재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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