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다룬 김인겸, 비엔날레 한국관 알린 주역이었다

2024. 5. 18.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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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친구들
김인겸(1945~2018)은 수원 출신이다. 수원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서울에서 신문기자를 하던 큰형님이 미술인을 많이 배출한 휘문고등학교로 진학할 것을 권했다. 한해 선배로 김상구(판화가), 한해 후배로 김영철(판화가) 등이 있는 휘문고 미술반에 김인겸은 들어가지 않았다. 휘문고등학교의 미술교사로 판화가 이상욱이 있었다. 김인겸은 미술반 소속은 아니었지만 이상욱을 멘토로 모셨다. 나중에 김인겸이 개인전을 열 때면 꼭 이상욱을 초대했다.

가족들과 작품놓고 심야 토론 즐겨

2017년 작품 설치 중인 미술가 김인겸. 평면과 입체를 초월한 조각 작품을 남겼다. [사진 유족]
고교를 졸업한 김인겸이 수원에 잠시 내려가 있는 동안 어느 미술학원에서 수원여중 3학년생인 윤정인(1949~2012)을 만났다. 김인겸은 재수를 거쳐 1965년, 애초에는 홍익대 건축과를 지망했으나 2지망인 조소과에 입학한다. 건축에 대한 관심과 역량은 그의 조각작품에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대학 3학년을 앞두고 군대에 입대했다. 복학을 하니 수원여고를 나온 윤정인이 홍익대 섬유과를 다니고 있었다. 둘은 가까워졌다.

대학동기로는 조각가 이일호, 김정명이 있었다. 이일호가 충청도 시골 출신으로 물렁한 성격이었다면, 김인겸은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덕분인지 도회풍의 까칠하고 깔끔한 성격이었다. 옷을 잘 입었고 여학생들도 많이 따랐다. 호오가 분명하여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의 경계가 분명하였다. 후배인 전국광, 김영원을 좋아했다. 선배로는 조성묵을 따랐다.

김인겸은 휴학, 복학을 반복하다 1972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1973년 평택의 진위중학교에 미술교사로 부임했다. 그리고 1974년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장녀 재도(미술평론가), 장남 산(사진가)이 태어났다. 1974년에는 수원의 유신고등학교에 부임하여 6년간 교사생활을 한다.

김인겸은 단조로운 교사생활에 답답함을 느꼈다. 홍익대 조소과 동문들의 왕성한 활동이 그를 자극했다. 1980년, 김인겸은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서울 방배동에 작업실을 차렸다. 서울대 출신의 조각가 심문섭이 작업실을 자주 찾아왔다.

2017년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열린 김인겸 회고전 ‘공간과 사유’. [사진 유족]
조각가에게 가장 큰 수입원은 조형물 제작이다. 대형 조형물을 제작하려면 여러 후배 조수들이 와서 도와야 한다. 방배동 작업실에서 일하는 후배 조수들이 집으로 와서 밥을 먹었다. 부인 윤정인은 함바집 주인처럼 매일 많은 음식을 차려야 했다. 김인겸은 작업에만 집중했다. 대학 동기들이 볼 때도 작업의 수준이 괄목상대할 정도로 급상승했다.

2024년 4월,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가 열렸다. 베니스의 몰타기사단 수도원에서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건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큰 전시회가 따로 열렸다. 30년 동안 한국대표 작가로 참여한 작가들의 전시에 김인겸의 작업도 있었다. 베니스비엔날레에 독립적인 한국관이 건립되어 그 안에서 한국작가들이 전시를 열 수 있었던 게 1995년이다. 김인겸은 이때 윤형근, 곽훈, 전수천과 함께 한국관 최초의 전시작가로 참가했다.

베니스비엔날레의 여러 국가관 중 가장 마지막으로 어렵사리 터를 잡게 된 한국관은 기존건물을 리노베이션한 것이었는데 그 설계를 건축가 김석철이 담당했다. 일반적인 전시공간은 텅 빈 사각형 공간이다. 그런데 한국관은 건물 한가운데에 있는 나선형 계단이 있는 복잡한 구조였다. 전시에는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김인겸은 나선형 계단을 작품 설치의 환경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계단을 오르내리는 관객이 작품 속으로 관통하게 하는 작업을 구상했다. 컴퓨터 모니터, CCTV, 에어펌프가 있는 아크릴 구조물 등 꽤 복잡한 재료와 장비가 동원되었다. 그런데 김석철의 건축설계 도면이 수시로 바뀌었다. 건축물의 구조와 마감을 일일이 베니스 시청과 협의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건축도면이 바뀔 때마다 김인겸의 도면도, 설치작업 구상도, 거기에 투입되는 재료와 부품과 장비도 다 바뀌어야만 했다. 수정에 수정을 반복하는 지루한 작업이었다. 힘든 일이었지만 보람도 있었다. 베니스비엔날레 참가 이후로 김인겸에 대한 작가적 평가가 급상승했다. 또 한국관의 까다로운 공간을 창의적으로 처리함으로써 후속 참가자들에게 많은 용기와 긍정적인 아이디어를 주었다.

1996년 실크로드 미술기행을 떠난 예술가들. 좌측 하단에 사진을 찍고 있는 김인겸. [사진 유족]
김인겸은 평소에도 건축가처럼 도면은 물론 꼼꼼하게 모형을 만드는 일에 대단한 집중력과 완성도를 보였다. 집중력이 지나치게 강했던 김인겸은 밤늦게까지 작업을 했다. 모형이 완성되면 그걸 집으로 들고 왔다. 그런 날이면 가족들은 잠을 포기해야 했다. 김인겸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가족들의 의견을 듣는 걸 좋아했다. 미술을 전공한 부인의 의견은 그렇다 치고 아이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는 작품을 본 첫인상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다. 작품에 지나치게 몰입한 자신이 놓쳐버린 걸 부인과 아이들은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아이들이 자라날수록 대화의 내용도 점점 깊어갔다.

김인겸은 요리를 좋아했다. 작품 도면이나 모형을 놓고 가족들과 밤늦게까지 대화를 하다 보면 시장기가 돈다. 그러면 김인겸이 라면을 끓였다. 끓은 물에 면과 수프를 넣고 다 익힌 다음 면을 찬물에 헹군다. 면에는 수프가 어느 정도 짭짤하게 배어 있다. 묵은지를 물에 헹구어 그 안에다 면을 넣어 김말이처럼 말아서 먹는 게 김인겸의 레시피다. 식당에 가면 셰프가 내어주는대로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참기름, 다진 마늘 등을 달라고 하여 본인의 방식대로 즉석에서 창작요리를 만들어 먹는다. 김인겸은 입맛은 원래 전형적인 토종이었다. 그런데 8년 가까이 프랑스 생활을 할 때는 양식도 잘 먹었다. 김인겸의 요리 철학은 명확했다. 한식, 중식, 양식 따질 필요 없이 제대로 된 음식은 다 맛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파리에서 신성희, 이배 등과 교류

1996년에는 퐁피두센터의 초청을 받아 파리에서 2년간 레지던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찌하다 보니 프랑스 체류가 2004년까지 이어졌다.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조형물도 제작하고 개인전도 열었다. 아무래도 국내 활동은 침체되었다. 이 무렵 국내의 환경조형물 시장은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김인겸 정도라면 환경조형물로 큰돈을 벌 수가 있었다. 김인겸은 자유가 좋았다. 자유를 통해 정신의 확장을 누리는 게 돈보다 더 시급했다. 계속 프랑스에 머물고 싶었다.

퐁피두미술관 맞은편에 레지던시 건물이 있었다. 복층이었는데 아래층은 작업실, 위층은 살림집이었다. 1996년 겨울방학 때 부인과 아들딸이 파리로 와서 가족이 프랑스 전역을 여행했다. 딸 재도는 이듬해 6월 파리를 다시 찾았다. 1달간 부녀가 함께 생활하다가 이후에는 기숙사로 따로 나가서 살았다. 일요일이면 한인교회에서 부녀가 만났다. 오전 예배를 마친 후 점심을 함께 먹고 미술관, 화랑, 벼룩시장을 다니며 부녀의 정을 쌓았다. 이 무렵 파리에서 김인겸이 자주 만난 화가로 신성희, 이배가 있었다.

국내에 정착한 이후 김인겸의 조각은 점점 얇아져 갔다. 입체는 짜부라져 평면에 가까워졌다. 일반적으로 조각은 형태나 매스(덩어리)를 다룬다. 김인겸은 공간을 다루는 조각가다. 공간을 다루는 국내의 조각가도 드물지만, 그 공간을 영혼으로 이어가는 조각가는 더욱 드물다, 공간에 대한 엄격한 이해와 그 공간이 영혼으로 이어지도록 깊은 통찰력과 영적 수련이 요구된다. 2007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작품들의 타이틀인 ‘spaceless’는 “지각의 대상으로서 물리적 공간(space)이며 동시에 사유의 명상공간(less)이기도 하다”(송미숙의 평론).

“예술이란 스승, (중략) 그는 무한이었고 영원이었다. 그리고 초월이었다. (중략) 어떤 좋은 생각도 내 마음이 움직이는 속도를 오랫동안 붙잡아 놓질 못했다. (중략) 그리고 흐르는 시간의 속도가 이제 내 마음의 속도보다 빨라졌다는 것과 함께···”(김인겸의 글). 김인겸은 어느 날 마음의 속도를 없앴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그토록 그리던 무한과 영원 그리고 초월이 그를 찾아왔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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