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윤 대통령의 ‘정체성’이 의심받는 순간
정체성이 흔들린다면 어떤 협치도 소용없을 것…
지지층마저 실망해 등 돌릴지 모른다
쏟아지는 용산발(發) 뉴스 중에서도 지난주 ‘비선(秘線) 메신저’ 보도는 충격적이었다. 어떤 공직도 없는 두 정치학자가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대리인을 맡아 물밑 교섭을 벌였다고 한다. 공식 라인을 제치고 비선이 가동됐다는 뜻인데, 자칭 메신저 두 사람이 인터뷰를 자청해 활약상을 떠벌리는 코미디까지 펼쳐졌다. 한국 정치사에서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모양새도 그랬지만 내용은 더 충격적이었다. 메신저들은 윤 대통령이 “강성 지지층과 참모들이 반대해 그간 이 대표를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고 전했다. 피의자와 마주 앉을 수 없다는 윤 대통령의 신념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대표에게 불편한 인사는 비서실장 인선에서 빼겠다”는 발언도 있었다고 했다. 이 대표의 대권 행보를 돕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윤 대통령이 “골프 회동, 부부 동반 모임도 하자”고 말했다는 대목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사실이라면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그림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기이한 것은 용산의 반응이었다. 대통령실이 보도를 부인하긴 했지만 강도는 뜨뜻미지근했다. “물밑 라인은 없었다”는 포괄적 부정뿐 문제의 발언들에 대해선 가타부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비선 교섭이 사실이 아니라면 자칭 메신저들은 대통령을 팔아 가짜 뉴스를 퍼트린 악성 범죄자다. 그러나 대통령실은 고발도, 정정 보도 신청도 하지 않았다. 내용이 워낙 구체적인 데다 용산의 대응까지 애매하자 여권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사실 같다”는 반응이 많았다.
메신저들이 전한 물밑 장면은 우리가 알던 그 대통령과 달랐다. 윤 대통령은 무얼 적당히 얼버무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호불호를 표시하는 바람에 대통령이 ‘격노’했다고 보도된 사안도 한두 건이 아니었다. 멀게는 ‘바이든 날리면’ 논란에서 새만금 잼버리 파행, 부산엑스포 유치 실패, 경찰 치안감 인사 번복, 가깝게는 채 상병 사건까지 큰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감정을 드러내며 적극적인 의사 표시를 해왔다. 그런데 자칭 비선들이 떠벌린 소리엔 대통령이 침묵하고 있으니 이게 뭔가 싶었다.
대통령의 격노는 종종 같은 편에게도 향했다. 총선 때 윤 대통령은 비서실장을 통해 한동훈의 비대위원장 사퇴를 요구하며 적나라하게 불신감을 표출했다. 지난해 국민의힘 전당대회 때는 안철수를 “방해꾼이자 적”이라 직격했고, 나경원에겐 ‘실망감’을 표명하며 출마를 막았다. 이준석을 향해 “내부 총질이나 하던 대표”라고 날 선 반감을 드러낸 문자도 공개됐다. 윤 대통령은 자신의 원칙을 관철시키려 의사들, 해병대 집단까지 적으로 돌린 사람이다. 그랬던 대통령이 물밑에선 이재명 대표에게 “골프·부부 회동” 운운하며 손을 벌렸다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지난달 윤 대통령이 박영선 전 중소벤처부 장관을 총리에,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을 비서실장에 검토 중이란 보도가 나왔다. 대통령실 공식 라인에선 즉각 부인했지만 몇몇 참모들은 “맞는 보도”라고 했다. 전체 맥락으로 볼 때 두 사람이 후보로 검토된 것은 사실인 듯했다. 이들이 누구인가. 박영선은 “대한민국은 문재인 보유국”이라며 ‘문비어천가’를 불렀고, 양정철은 문재인의 히말라야 트레킹을 수행한 친문의 핵심 중 핵심이다. 아무리 야당 협조가 간절해도 이런 인물까지 끌어들인다면 보수의 자존심이 뭐가 되느냐는 반응들이 쏟아졌다.
윤 대통령은 살아있는 권력과 맞짱 뜬 법치의 수호자로 인식돼왔다. 며칠 전 검찰 인사는 그 이미지에 금이 가게 하는 것이었다. 김건희 여사 수사 라인을 모두 교체함으로써 3년 전 문 정권의 수사 방해 인사와 판박이란 지적을 자초했다. 당시 문 정권은 조국 비리, 울산 선거 개입 사건을 방탄하려 수사팀을 해체해 버렸다. 윤 대통령도 명품 백, 주가조작 의혹 등의 수사 지휘부를 교체하고 측근을 서울중앙지검장에 앉혔다. 문 정권의 방탄용 검찰 사유화와 무엇이 다르냐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윤 대통령은 문 정권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통령이 됐다. 문 정권의 폭주에 기겁한 국민이 ‘문 정권 시즌 2′는 막아야 한다는 염원을 담아 정치 초보인 그를 대통령에 뽑아주었다. 좋든 싫든 반문(反文)의 가치는 윤 대통령을 만든 정치적 출발점이다. 사람과 진영을 적대시하라는 게 아니라 문 정권이 남긴 불공정과 비상식, 내로남불, 법치 유린의 잔재를 해소하고 비정상을 정상화시키라는 것이다. 이것이 국민이 부여한 윤 정권의 정체성이다.
지금 윤 정권이 겪는 곤경이 야당에 고개 숙이지 않았거나 앞 정권 인물을 쓰지 않은 탓은 아닐 것이다. 공정과 상식, 법치와 문 정권 극복이란 본연의 가치를 지켜내지 못하는 한 어떤 협치도 국정 안정을 이루어낼 수 없다. 윤 정권을 탄생시킨 정체성의 기본이 의심받는 순간, 충성 지지층마저 실망해 등을 돌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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