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약자법의 진짜 이름은 ‘2등 노동자 고착화법’?[설명할 경향]

김지환 기자 2024. 5. 1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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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4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고맙습니다, 함께 보듬는 따뜻한 노동현장’을 주제로 열린 민생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플랫폼·프리랜서 근로자들…. 배달라이더로 대표되는데 많습니다. 웹툰작가도 있고요. 사실은 이게 전부 노동자거든요. 자기 노동을 판매해서 대가를 받으니깐요.”

지난 14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열린 25번째 민생토론회 중 나온 발언입니다. 화자는 노동계 인사가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입니다. 이 대목만 놓고 보면 플랫폼 종사자, 프리랜서도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해 권리를 보장하자는 취지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나요. 윤 대통령은 노동약자 지원·보호법 제정을 약속하면서 “사업주가 있을 때만 노동자가 되는 노동법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도 말했습니다. 이는 특수고용직·플랫폼 종사자(노무제공자), 프리랜서 등 비임금노동자의 ‘사용자 찾기’는 일단 제쳐두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비임금노동자의 노동자성 여부를 따지지 않고 공제회 설치, 분쟁 조정, 표준계약서 작성 등의 지원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노동약자 지원·보호법은 완전히 새롭게 나온 아이디어는 아닙니다. 노동시장 변화에 따라 비임금노동자 규모는 850만명에 육박하는데 이들에 대한 보호엔 구멍이 뚫려 있어 비임금노동자 보호를 위한 법·제도를 마련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진행됐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21대 국회에 발의된 플랫폼종사법, 일하는 사람 법 등입니다. 이들 법안과 노동약자 지원·보호법의 차이를 살펴보면서 노동약자 지원·보호법의 한계를 짚어보려고 합니다.

비임금노동자를 노동관계법 체계로 포섭하는 방안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번째 유형은 해석론을 통해 비임금노동자를 노동관계법상 노동자로 포함시키거나 현행 ‘근로자’ 및 ‘사용자’ 규정을 손질해 비임금노동자에게 노동관계법을 전면 적용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유형은 개별 법령의 입법목적이나 보호 필요성에 따라 적용 범위를 각각 규정하는 방식입니다. 배달라이더, 대리운전기사 등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는 아니지만 현재 산재보험·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데요. 산업재해보상보험법·고용보험법이 노무제공자 중 대통령령이 정하는 직종에 한해 산재보험·고용보험 당연가입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유형은 노동자와 자영업자 사이 제3의 영역(회색지대)을 설정해 포괄적으로 보호하는 방식입니다.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아직 인정받지 못한 비임금노동자도 일정한 노동자성이 있다고 볼 수 있으니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만큼은 아니지만 기본적 권익은 보호해주자는 취지입니다.

장철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1년 3월 대표발의한 플랫폼종사자법은 세번째 유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플랫폼 종사자 복지 증진을 위한 공제사업 실시, 사업주의 분쟁 해결 노력 의무, 계약 해지 시 15일 전 사업주의 서면 통보 의무, 정부의 표준계약서 개발·보급 의무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장철민 의원안은 문재인 정부 당시 고용노동부가 힘을 싣던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 법은 이수진 민주당 의원, 이은주 전 정의당 의원 등이 대표발의했습니다. 이수진 의원이 2022년 11월 대표발의한 ‘일하는 사람의 권리보장에 관한 법’은 “기존 노동법 체계에서 제외된 다양한 노동자들까지 포함해 ‘일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이들의 보편적인 권리보호를 위한 기본법을 제정”하는 게 입법 목적입니다. 이 법에는 사업주의 균등 처우 의무, 부당한 계약해지 제한, 적정 보수 보장, 1년 이상 일한 경우 연간 15일 이상 휴식일 보장, 출산전후휴가·육아휴직 보장, 괴롭힘의 금지 및 예방, 대통령령이 정하는 사업자에게 산업안전보건법 적용 등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법, 산업안전보건법 중 일부를 보장하는 방식입니다.

이은주 전 의원안도 이수진 의원안과 유사한 골자인데요, 일하는 사람의 범위에 ‘고용원이 없는 1인 자영업자’도 넣은 것이 차이점입니다. 오민규 플랫폼노동희망찾기 집행책임자는 “일하는 사람 법은 ‘플랫폼종사법 플러스 알파’다. 플랫폼종사자법처럼 비임금노동자를 노동관계법 체계로 포섭하는 방안 중 세번째 유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유럽운수노련이 ‘플랫폼 노동 지침’ 가결을 환영하며 엑스(X·옛 트위터)에 올린 이미지.

유럽의 경우 플랫폼 종사자의 노동자성을 추정하는 방향으로 법·제도 개선을 추진 중입니다. 유럽연합(EU) 의회는 지난달 24일 ‘플랫폼 노동의 노동조건 개선에 관한 지침’을 가결했습니다. 이 지침은 업무수행에 대한 통제·지시를 보여주는 사실이 확인될 경우 고용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5개의 판단 지표 중 2개 이상 해당할 경우 노동자로 추정하는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고용관계 추정 시 플랫폼 종사자가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은 플랫폼 기업이 입증해야 합니다. EU의 접근법은 비임금노동자를 노동관계법 체계로 포섭하는 방안 중 첫번째 유형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윤 대통령이 제정을 약속한 노동약자 지원·보호법은 세 가지 유형 중 어디에 속할까요. 노동약자 지원·보호법은 노동자성 여부를 따지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에 어느 유형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플랫폼종사자법, 일하는 사람 법, EU의 지침보다 비임금노동자를 보호하는 수준이 낮기 때문에 사용자단체 저항이 약하겠지만 권리 보호의 측면에선 가장 취약합니다.

윤 대통령은 민생토론회 마무리 발언에서 “시장경제 시스템에서 신분과 사회적 지위의 양극화가 고착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노동약자 지원·보호법은 비임금노동자를 ‘2등 노동자’ 신분으로 고착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노동계에서 나옵니다.

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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