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달리지 않는 연습이 필요해[이주영의 연뮤덕질기](25)

2024. 5. 1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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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천 개의 파랑> ·연극 <이상한 어린이 연극 오감도> 등
뮤지컬 <천 개의 파랑> 공연 장면 /서울예술단 제공



“이건 이 이야기의 결말이자 나의 최후이다. 투데이는 며칠 전까지 안락사가 결정된 경주마였다. 나는 폐기를 앞둔 기수였다. 난 떨어지고 있다. 내 이름은 콜리다. 브로콜리의 색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뮤지컬 <천 개의 파랑>(천선란 원작·김한솔 극작·김태형 연출·박천휘 작곡)은 주인공인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콜리의 마지막으로 문을 연다. 경주마 투데이를 타고 달리는 콜리의 독백은 모든 서사를 압축한 듯 상징적이다.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상하좌우로 움직이는 대형 LED(발광다이오드) 패널 영상과 서라운드 음향은 경마장으로 관객을 이끈다. 홀로 질주하던 투데이와 콜리는 어느새 경주마들 사이에 들어선다. 시속 100㎞ 신기록 보유 경주마 투데이와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 이야기의 시작이며 마지막이기도 하다.

뮤지컬 <천 개의 파랑>은 기획단계부터 화제였다. 같은 원작의 연극 <천 개의 파랑>(천선란 원작·김도영 각색·장한새 연출)과 한 달 시차로 개막했다. 콜리를 어떻게 재현할지 궁금증도 증폭됐다. 연극을 제작한 국립극단은 로봇 배우의 출연을 예고했으나 로봇이 장애를 일으켜 개막을 2주 연기한다고 했다. 한 달 후 개막하는 뮤지컬 버전으로 이목이 쏠렸고, 제작자인 서울예술단 측은 “안전하게 인형(puppet·인형·꼭두각시)을 사용한다”라고 부연했다.

두 작품 개막으로 관객은 행복하다. 베스트셀러 소설 원작의 전혀 다른 해석을 동시에 접하는 것은 귀한 경험이다. 연극 속 로봇 얼굴의 LED 표정과 세밀한 고갯짓과 팔 동작은 관객들의 미소를 자아낸다. 미리 녹음된 대사를 기계음으로 변환해 조종실에서 장면에 맞춰 출력하는 방식으로 다른 배우들과 상호작용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인형은 퍼펫티어(인형 조종자)가 팀으로 움직이며 배우의 노래와 안무를 보조한다.

■ 소설 원작 연극·뮤지컬로 개막해 화제

뮤지컬에서 콜리는 투데이를 직접 타고 달리지만, 연극의 콜리는 내면을 연기하는 인간 배우가 미는 끌차에 실려 조명으로 표현된다. 재현의 주체가 다르니 서사도 다르게 인식된다. 대극장 뮤지컬은 40여명의 출연진의 군무와 무용극으로 원작 소설의 흐름을 재현한다. 소극장 연극 버전은 작품의 중요한 사건 위주로 전개하며 철학적인 질문을 한다. “인간이 재밌는데 왜 말이 달리나요?”, “말이 재밌어하는 건 어떻게 알아요?”, “모두가 천천히 기다려주면 좋을 텐데요” 같은 콜리의 원작 속 대사들은 두 버전의 작품에 모두 등장하지만 뮤지컬에서는 천진하고 밝게, 연극에서는 심오하고 철학적으로 와닿는다. 왜 다들 질주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본질을 꿰뚫는 콜리의 질문은 지친 이들에게 위안을 준다.

부족함 없이 자란 듯 보이는 현대 아이들도 콜리와 비슷한 지점이 궁금하다. 바쁘게 질주하는 어른들의 바람과 기대로 불안을 내재하며 살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어린이 배우들과 함께 만든 공동창작극 <이상한 어린이 연극 오감도>(강훈구 구성·연출)는 현대사회를 사는 어린이들의 생각을 전시한 작품이다. 이상의 시 <오감도>에 담긴 90년 전 경성의 혼돈을 현대를 사는 아이들 시선에서 본 한국의 혼돈으로 풀이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뽀로로나 오은영 박사가 아이들 편에서 전하는 ‘도전하는 인생이 멋진 거야’, 혹은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니 두려워 말라’ 등의 응원은 언젠가 성공할 터이니 열심히 살자는 압박으로 들린다. 노키즈존이 무섭다는 아이들, 전쟁과 기아가 무섭다는 아이들은 미래의 자신과 만나는 마지막 장에서 “무서우면 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위로의 말을 전한다.

질주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두려움은 은둔자들을 양산한다. 뮤지컬 <더 라스트맨>(김지식 작·작사, 김달중 연출, 권승연 작곡)은 세상의 급발진에서 소외된 은둔자를 담은 1인극이다. 좀비들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는 지하벙커에 숨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좀비와 고독과 굶주림을 극복한다. 세기말을 은유하는 지하벙커 세트는 생존자의 고독을 표현하기에는 최적이다. 온갖 장애와 공포를 극복하며 생존하려는 몸부림은 고단하고 지친 관객들의 자화상 같기도 하다.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 공연 장면 /에스앤코㈜ 제공



군중 속에서 더 고독한 주인공은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스티븐 레벤슨 작, 파섹 앤 폴 작곡·작사 박소영 연출 한정석 번역)에도 등장한다. 주목받는 것도 주목하는 것도 불편하고 손에 땀이 나는 에반이 동급생 코너의 자살을 계기로 주위를 돌보며 세상과 소통하는 이야기다. 세상의 속도와 다른 에반의 내면은 뮤지컬 <더 라스트맨>의 생존자를 연상케 한다. 코너의 절친으로 오해받고 코너 부모들을 위로하기 위해 가짜 e메일을 전하면서 작은 거짓말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무대는 SNS와 채팅창 등으로 뒤덮여 있다. 거짓말과 확대 재생산의 매개들이기 때문이다. 동상이몽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브로드웨이 화제작의 아시아 초연이다. 유명한 넘버 ‘Waving Through A Window’ 마니아가 많아 객석의 반응은 폭발적이지만 약물로 인한 자살과 교내 캠페인이 한국 정서와는 다르다는 의견도 많다.

■ 질주하지만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브라이언 요키 작·작사, 톰 키트 작곡, 박준영 연출, 박천휘 번역)은 아들 잃은 엄마의 조울증 치료과정을 담은 가족극이다. 한국에서는 다섯 번째 공연이라 고정 팬이 많다. 깊은 슬픔을 빨리 치유하려는 남편의 배려가 오히려 의존과 망각을 양산해 조울증을 더 깊어지게 하는 과정을 점증 서사로 표현한다. 가족 간의 소통이 메마르고 고독감이 증폭되는 원인이 배려에서 비롯됐다는 역발상이 뜨끔하게 한다.

뮤지컬 <천 개의 파랑>에서 울림을 주는 장면은 휠체어를 타는 은혜가 다양한 연령대의 사회구성원들 도움으로 자유를 얻어 날아다니는 안무다. 소극장 연극에서는 짧은 대사로 처리됐으나 대극장 뮤지컬에서는 한편의 무용극으로 만들었다. 엔딩은 프롤로그에서 예고한 마지막 경주 장면이지만 보이는 양상은 전혀 다르다. 기수가 탄 경주마 대신 앙상블이 등장해 더 느리게 달리기 위해 퍼포먼스를 한다. 누구를 제치는 것이 아닌 각자 속도로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때로는 뒤로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콜리가 투데이에게 전하는 “천천히 이 순간을 즐겨. 살아 있는 모든 순간 언제나 옆에 있던 소중한 것들 가슴에 가득 품고 갈 수 있도록”이 절절히 와닿는다. 느리게 달려야만 하는 이유다.

연극 <천 개의 파랑>·<이상한 어린이 연극 오감도>는 몇 주 전 막을 내렸다.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은 5월 19일, 뮤지컬 <천 개의 파랑>·<더 라스트맨>은 5월 26일,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은 6월 23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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