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야 “‘내돈내구’ 실천… 꽃몽우리 대학생들에 구호현장 전하니 보람”[요즘 어떻게]

장재선 기자 2024. 5. 17.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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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어떻게 - 국제구호활동가 한비야
“여행하다 어려운 사람 보면
도움 필요한 부분 바로 구호
구호선배 남편과 남미 다녀
한국 3·네덜란드 3·각자 6개월
‘3·3·6’생활 지키는 지지자”
한비야 씨는 처음엔 스카프를 맨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런 후에 “이 인터뷰 기사가 언제 게재될지 모르겠으나, 그때쯤이면 덥게 보일 수도 있을 거예요”라며 스카프 없는 옷차림으로 촬영을 했다. 그 특유의 두름성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백동현 기자

최근 이화여대 본관 옆 카페에서 만난 한비야 씨는 여전히 활기찼다. 십수 년 전 만났을 때 그의 말이 너무 빨라서 귀가 바빴었는데, 이제 다소 느려져서 듣기가 편했다. 그러나 ‘자가발전기를 부착한 에너자이저’ 느낌은 같았다.

그가 건넨 명함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한비야 국제학 박사/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국제학과 초빙교수’. 대학원과 학부 수업을 함께 맡아 국제구호, 개발협력을 가르친다고 했다.

“아이들 눈을 보며 가르치는 게 너무 좋아요. 학생들이 덜 핀 꽃몽우리 같아서 활짝 피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올해 66세인 그는 3년 후 강의를 그만둘 생각이다. 초빙교수 정년은 70세이지만, 현장에 있는 동안만 학교서 가르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세계 곳곳의 재난 현장에서 긴급 구호 활동을 하고, 그 경험을 다음 해에 강의한다.

“저는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교장 임기가 끝났을 때 이제 현장에 안 갈 줄 알았어요. 그런데 특임고문을 맡게 돼서 내후년까지는 가게 됐지요(웃음).”

그는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카카오톡은 하지만, 페이스북과 유튜브 활동 등은 일절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 소식을 모른다고들 궁금해하더군요. 그런데 일상을 즉각적으로 드러내는 SNS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저는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해서 정제된 것을 내보내야 한다는 자가 검증이 심해요. SNS가 대세인 세상이니 제 생각이 나중엔 변할지 모르겠으나….”

알려진 것처럼, 그는 30대에 육로 세계일주에 도전한 여행 작가로 이름을 떨쳤다. 40대부터는 한국을 대표하는 긴급 구호 활동가로 일했다. 50대엔 세계 재난 현장에 다니는 한편으로 석사(인도적 지원학) 공부를 하고, 60대에 국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젊었을 땐 공부할 시간에 현장 구호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주변 권유로 시작한 박사 공부가 의미가 있더군요. 현장에서 구호가 필요한 증거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정책에 잘 반영할 수 있게 하는 3박자 기능을 갖추게 됐으니까요.”

그는 대학원에서 영어로 강의한다. 학생 중 1명만 한국인이고, 나머지는 독일, 모로코, 브라질, 에콰도르, 팔레스타인에서 온 외국인이다. “제가 외국에 유학할 때가 생각나서 정말 힘껏 가르쳐주고 싶어요. 이대 등록금과 서울 생활비가 비싼데도 한국에 온 것이잖아요.”

그는 월드비전에서 상사로 만났던 네덜란드 긴급 구호 전문가 안토니우스 반 주트펀과 지난 2017년 결혼했다. 2020년에 펴낸 책 ‘함께 걸어갈 사람이 생겼습니다’에는 결혼 생활의 안과 밖이 진솔하게 펼쳐져 있다. 그는 “책에서 공개한 ‘3, 3, 6’의 삶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3개월, 네덜란드에서 3개월 함께 지내고 나머지 6개월은 각자의 삶을 산다는 것.

“지금까지 저는 세계 104개국, 남편은 154개국을 여행했어요. 결혼한 후로 겨울마다 중남미를 남편과 여행하고 있어요. ‘바람의 딸’ 시즌 1은 혼자 다녔다면, 시즌 2는 함께 다니는 거지요. 그러면서 ‘내돈 내구’ 프로젝트를 실천해요.”

‘내돈 내구’는 내 돈으로 내가 구한다는 뜻이다. 여행을 하다가 그 동네에서 어려운 사람이 눈에 띄면 즉각 구호에 나선다는 것이다. “그 지역 신부님과 두 시간만 이야기를 나누면, 누가 가장 도움이 필요한지 알 수 있어요. 교복 없어서 학교 못 가는 소녀, 팔을 다쳤는데 병원에 못 가는 사람을 작은 돈으로도 도울 수 있어요. 참 짭짤해요.”

 그는 ‘내돈 내구’ 사례들을 이야기하다가 ‘짭짤하다’는 표현을 여러 번 쓰며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봉사 중독자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스스로 선천적 조증이라는 그도 인생의 가을에 들어서며 노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불안감, 자괴감 등으로 삶의 배가 흔들리는 것인데, 그럴 때 제 자리로 돌아오려면 평형수가 필요하지요. 제 첫 번째 평형수는 하느님께 모든 일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초등생 때부터 매일 손으로 써 온 일기장이지요. 셋째는 수녀였다가 환속한 시인 친구와 남편이에요. 19세 때부터 지금까지 우정을 나눠온 친구 김혜경과는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응원합니다. 결혼한 이후로는 남편이 지지자이자 비판자로서 평형수 역할을 해 줘요.”

첫 번째 평형수로 하느님을 든 그는 자신의 이름 ‘비야’가 영세명이었다고 했다. 그걸로 아예 본명을 바꾸며 한자(飛野)를 붙였다. “제 이름이 참 좋아요. 아프리카에서는 큰물항아리라는 뜻이어서 가뭄 들 때 가면 엄청 반기지요. 인도서는 내 사랑이라는 뜻이래요.”

그런 이야기 끝에 그는 요즘 성당에서 초청 강의를 한다고 전했다. “독서 프로젝트로 하는 강의예요. 6월 18일엔 서울 상봉동 성당에서 하는데, 꼭 오셔요.”

장재선 전임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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