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적인 1류 기업, 천하태평 3류 정부[이철호의 시론]

2024. 5. 17.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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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고문
삼성전자 등 대미 로비에 공들여
반도체 운명 걸린 미·중 패권경쟁
8년 뒤 美 생산 3배↑ 한국 ⅓↓
1분기 1.3% 성장에 도취한 정부
미·중 코끼리 싸우면 풀만 죽어나
3류 정부라도 직무 유기는 안 돼

역대 방한한 미국 대통령들의 첫 일정은 항상 미군 기지 방문이었다. 그다음에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2017년 11월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부터 찾았다. 2022년 5월 조 바이든 대통령은 뜻밖이었다. 바로 삼성전자 평택공장부터 방문해 그곳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처음 대면했다. 바이든 옆에는 ‘저승사자’라는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이 따라다녔다.

두 정상의 연설은 단상 위에서 미국 국적의 삼성전자 직원 30여 명이 지켜보았다. 단상 아래에 양국 수행원 50여 명이 앉았는데, 유독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 두 달 전 삼성전자 대외협력 부사장으로 스카우트 된 마크 리퍼트 전 대사였다. 대표적 지한파인 그는 주한 미국대사 시절 괴한에게 습격당하기도 했고, 미 민주당 내에 탄탄한 인맥을 갖춘 인물로 꼽힌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보고 싶다, 형제여(brother)’라는 이메일을 보낼 만큼 최측근이었다. 바이든의 삼성 방문을 성사시킨 숨은 주역이다.

삼성전자가 대미 로비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절박함 때문이다. 당장 2000억 달러(약 262조 원) 규모의 현지 반도체 공장을 무리 없이 지어야 한다. 미 정부가 약속한 보조금도 받아내야 한다. 사소하지만, 까다로워진 미 전문직 취업비자(H-1B)도 문제다. 2022년 전체 H-1B 비자 중 한국에 발급된 것은 고작 1.04%였다. 기술 인력 부족으로 자칫 반도체 공장을 못 돌릴 판이다.

더 중요한 숨겨진 이유는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의 유탄이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불길한 조짐이 감지된다. 그동안 메모리 반도체 수출은 중국·베트남에 쏠렸고, 그곳에서 스마트폰·컴퓨터로 조립돼 세계로 퍼졌다. 하지만 지난해 74%였던 대중 수출 비중이 올 1분기 40%로 급감했다. 다행히 미국·대만으로 나가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출이 늘었다. TSMC 등에서 인공지능(AI)용 반도체로 조립돼 미국 엔비디아에 납품되는 물량이 급증한 것이다.

하지만 HBM 선두주자인 SK하이닉스의 최태원 회장은 최근 뜻밖의 고백을 했다. “반도체 롤러코스터는 앞으로 계속될 것”이라며 “이제 미세화가 어려워 기술보다는 캐펙스(CAPEX·설비투자)가 더 중요한 숙제”라고 털어놓았다. 반도체 팹 하나에 30조 원이나 들다 보니 리스크 분산을 위해 보조금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는 칩스법에 따라 2032년 전 세계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10나노 이하 첨단 반도체 생산능력 비중이 지금의 3배인 28%로 치솟을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은 31%에서 9%로 급락한다.

정부는 1분기 1.3% 깜짝 성장에 도취된 분위기다. “재정 중독에서 벗어나 민간이 주도한 성장”이라며 자화자찬이 한창이다. 하지만 환율 급등 덕분에 1∼4월 전체 수출은 9.7% 늘었지만, 반도체를 제외하면 3.2% 증가에 그쳤다. 반도체 보완재로 평가받던 2차전지 수출은 21% 급감했다. 여기에 미국이 14일 2차 관세 전쟁에 돌입했다. “중국의 과잉 생산과 보조금은 경쟁이 아니라 반칙”이라며 중국산 전기차·배터리 등에 관세를 두 배로 끌어올렸다. 중국이 “이성을 잃은 횡포”라고 반발했지만, 도미노 관세 인상은 막기 어려워 보인다. 같은 날 미국의 중국 커넥티드 카 규제 방침이 나오고 미 의회엔 중국산 드론 관세 인상 법안이 제출됐다. 하루 하나 꼴이다.

코끼리끼리 싸우면 풀만 죽어난다는 아프리카 격언이 있다. 신냉전 시대에 한국은 한미동맹을 최상으로 끌어올리면서 한·중 관계도 관리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다. 이런 역사적 환절기에 기업들이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반면, 정부는 느긋한 분위기다. 지난해 8월 윤 대통령의 구애로 미 AMAT가 오산에 연구개발용 부지를 매입했는데, 불과 석 달 뒤 국토교통부가 아파트 부지로 선정해 버렸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뒤늦게 대체부지를 찾아 준다고 하지만 애초 계획은 엉망이 됐다. 2022년에 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늑장 대응으로 12조 원을 날릴 뻔하더니 이번에는 일본 정부의 네이버 축출에 뒷북을 치고 있다. 민간 주도가 중요하지만, 정부 직무 유기까지 허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우리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 기업은 2류”라는 어록은 29년이 흘러도 여전히 명언이다.

이철호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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