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걸 잃고 휘청일 때… 필요한 건 극복 아닌 ‘직시’[시인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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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빨리 읽을 수가 없다.
책 속에 길고 지난한 시간이 농축되어 있어, 말하자면 텍스트가 통째로 '엑기스' 같아 한꺼번에 흡수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고혈로 쓰인 책은 독자의 피에 섞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삶이 휘청일 때 사랑이 큰 사람은 도망가지 않고 직시함을, 직시가 고요한 '응시'로 자세를 바꿀 때 지혜를 얻을 수 있음을 나는 이 책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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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빨리 읽을 수가 없다. 누가 코에 고삐를 채운 것처럼 끌려가듯, 읽기는 읽는데 두려워 멈칫거리고 후퇴할 구멍을 찾느라 두리번거리게 된다. 이 책이 그랬다. 나는 이 책을 한 달 동안 읽었다. 느린 독서였다. 책 속에 길고 지난한 시간이 농축되어 있어, 말하자면 텍스트가 통째로 ‘엑기스’ 같아 한꺼번에 흡수할 수 없었다. 한 달 동안 이 책에 빠져 있었다. 읽지 않는(못하는) 시간에도 책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지금도 책의 자장 안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누군가의 고혈로 쓰인 책은 독자의 피에 섞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나는 책 내용을 말하지 못하고(않고)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책의 생생함이 납작해지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서 말해보겠다.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엘리)는 이상희 작가의 첫 책으로 어느 날 큰 사고를 당한 남편의 곁에서 그를 간호하며 쓴 글이다. 몇 년 동안 사경을 헤매던 남편 곁을 지키며 그를 살려냈고, 글을 통해 무너질 수도 있었을 자신을 살렸다. 작가는 힘든 경험을 감정에 호소하거나 넋두리로 소비하지 않는다. 어느 날 자기에게 찾아온 불운을 직시하고, 파악하고,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을 침착하게 서술한다. 이성과 감정을 고루 사용해 돌봄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헤아리고, 회복 후 생활로 돌아온 환자가 맞닥뜨리는 새로운 두려움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꾸준히 성장한다. 막막한 시간 속에서 지혜를 쌓는다.
“만약 ‘인간이 소중한 것을 잃고 어떻게 살아가느냐’ 묻는다면, 그 대답이 ‘적응’이나 ‘극복’일 수는 없다는 걸 우리는 매일 배워가는 중이다.”
‘극복’은 바깥에 선 사람이 건네기 편해서 꺼내 드는 말이다. 당사자에겐 관념적이고 무자비한 말일 뿐이다. 사랑으로 두려울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 책을 건네겠다. 두렵지만 끝까지 ‘직시’하는 일도 사랑이 아니겠는가. ‘직시’의 사전적 의미는 “정신을 집중하여 어떤 대상을 똑바로 봄”이다. 삶이 휘청일 때 사랑이 큰 사람은 도망가지 않고 직시함을, 직시가 고요한 ‘응시’로 자세를 바꿀 때 지혜를 얻을 수 있음을 나는 이 책에서 배웠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온전치 않더라도, 삶은 ‘밝음’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이제 나는 믿는다.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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