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째 박혀 있는 총탄보다 오월단체 분열 뼈아파”

김용희 기자 2024. 5. 1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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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가슴에 맞은 총탄을 빼내지 못한 심인식씨가 지난 11일 자신의 엑스레이 사진을 기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전두환, 노태우가 재판받을 때만 해도 5월단체가 똘똘 뭉쳤는디, 공법단체 되고 나니까 서로 이권 차지하려고 싸우는 모습이 꼴 보기 싫어서 인자는 쳐다도 안 봐. 앞으로 44년은 더 살아야 될 것인디 언제까지 저럴랑가 모르겄소.”

지난 11일 광주 서구의 한 교회에서 만난 심인식(75)씨는 5·18단체 이야기가 나오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광주에 살며 작곡 일을 했던 그는 2001년 늦깎이로 신학대를 졸업한 뒤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심씨는 5·18 때 가슴에 박힌 총탄을 빼내지 못하고 44년간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한때는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임원을 맡아 투쟁에도 앞장섰지만 2017년 뇌경색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부상자회가 밥그릇 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된 뒤에는 거리를 두고 살고 있다. 5·18부상자회는 5·18민주화운동공로자회와 함께 지난해 2월 특전사동지회와의 화해 이벤트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며 광주 시민사회와 갈등을 빚었다. 최근 국가보훈부 감사에선 유령 직원에게 급여를 지급하거나 법인 차량을 임직원이 사적으로 사용하는 등 국가보조금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 수사를 받을 처지에 놓였다.

“1990년대 초반까지도 부상자회가 세 군데나 있었어. 그래도 전두환·노태우 재판 때는 똘똘 뭉쳐서 한마음으로 싸웠제. 근디 공법단체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우려가 됩디다. 그게 실제 상황이 되어부렀어.”

심씨는 1980년 5월 당시 광주와 정읍을 오가며 악단 일을 했다. 5월18일 정읍 쪽 계약이 끝나 19일 광주 남구 서동에 숙소를 구해 이사했다. 광주 상황을 몰랐던 그는 이삿짐 트럭을 타고 가다 시내에서 곤봉을 든 군인들을 보고 ‘고생한다’며 손까지 흔들어줬다고 한다. 숙소에 도착해 한참 이삿짐을 풀고 있는데 군인 3명이 “여기 학생 있느냐”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대학생인 주인집 아들이 밖으로 나오자 군인들은 이유도 없이 마구 때렸다.

동네 사람들이 말려 군인들은 물러났지만 심씨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광주 친구들로부터 그동안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길로 거리로 뛰쳐나갔다.

“20일 밤을 밖에서 새우고, 21일 점심때 금남로4가 중앙극장 앞에서 주먹밥을 얻어먹었지. 소금하고 참기름만 들어갔는디 배가 고프니까 맛있더라고. 두덩이째 먹고 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나는 거여.”

밥을 나눠준 아주머니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녀를 뒤에서 안아 길 가장자리로 옮기려는데 ‘퍽’ 하는 느낌과 함께 팔의 힘이 쭉 빠지며 가슴에서 피가 솟구쳤다. 총알구멍을 손으로 막고 무작정 뛰었다. 사람들 도움을 받아 전남대병원을 거쳐 광주기독병원에 입원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을 곤봉으로 때리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운 좋게도 목 아래로 들어간 총알은 심장을 비켜 가 척추와 갈비뼈가 만나는 곳에 박혀 있었다. “혈관이랑 신경은 다행히 안 건드렸다고 하드라고. 겨우 살았어.”

심씨가 총을 맞은 곳은 계엄군이 있던 도청 앞 분수대로부터 700m 남짓 떨어진 곳이다. 심씨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총알에 맞았거나 건물 옥상에 있던 저격수가 쏜 것으로 추정했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980년 5월21일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최소 35명이 사망하고 162명이 총상을 입은 것으로 결론 내렸다.

두달 뒤 퇴원한 심씨는 1982년 5·18광주의거부상자회에 들어가 10년 넘게 임원으로 활동했다. 1995년 전두환, 노태우가 기소되자 20개월간 ‘전두환·노태우 사법 처리를 위한 상경 투쟁위원회’를 꾸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노숙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총상 후유증은 오래갔다. 그는 “약으로는 통증을 참기 힘드니까 여러번 총알을 빼내보려고 했지만 수술을 하면 실패 확률이 70%라는 말에 마음을 접었다”고 했다. 갈비뼈 아래쪽에 수술기구를 넣어 심장과 혈관,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 빼내야 하는 고난도 수술이어서 의사들도 생존을 장담하지 못했다고 한다.

“요즘도 주먹밥 나눠주다 총 맞은 그 아줌마가 생각난다”는 그는 “요즘 그분들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워 미치겠다”고 했다. 무엇이 부끄러운지를 묻자 “다 보지 않았느냐”고 했다.

“5·18 이름 걸고 싸우는 거 그만해야지. 무슨 ‘대의’를 위한 것도 아니고. 죽은 사람들한테 미안해. 이 꼴 보려고 내가 살아서 운동했나 싶을 정도야.”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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