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보수정당은 ‘양남’ 바깥에서 힘을 못 쓰나

조귀동 ‘이탈리아로 가는 길’ 저자·정치경제 칼럼니스트 2024. 5. 1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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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귀동의 정조준] ‘기득권 극대화’ 정치개혁에 부메랑 맞은 국민의힘

● 현직 초우위 정당 질서가 탄생한 이유
● 22대 총선, 기형적 정치개혁 종합선물세트
● 유권자 이해관계 반영 못 하는 정치 市場
● 10년마다 선거제 바꾼 이탈리아의 오늘
● 독립적 지방의회 위한 법 개정부터 해야

4월 22일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실 주최로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2024 총선 참패와 보수 재건의 길’ 세미나. [뉴스1]
"제가 나간 지역은 지난 12년 동안 네 번 선거에서 진 곳입니다. 조직이랄 게 없고요. 시의원, 구의원이 민주당에 비해서 턱이 없습니다. 뭘 어떻게 해보기 어려운 여건이었습니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천 남동갑 선거구에 출마해 낙선한 손범규 전 국민의힘 후보는 자신의 지역구 상황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총선 2주 뒤 윤상현 의원 주최로 열린 '2024 총선 참패와 보수 재건의 길' 토론회에서다. 그는 "김영주 영등포갑 당협위원장께서 '민주당에서 나와서 국민의힘 영등포에 가보니 조직이 하나도 없더라'고 말씀하셨다"며 후보가 오로지 개인기로 선거 캠페인을 진행해야 했다고 털어놨다.

총선 결과를 놓고 국민의힘이 '양남(영남 및 서울 강남) 정당'이 됐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계속해서 나온다. 전통적 보수 지지층에 갇혀 중도 성향 유권자를 겨냥한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거운동 과정을 보면 단순히 정책을 만드는 데 무관심해서, 혹은 이념 투쟁에 경도돼서 진 것만은 아니다. 손 전 후보의 지적대로 국민의힘의 수도권 조직 역량은 취약하기 짝이 없다. 지역구 유권자의 실질적 니즈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정책 대안을 만들어내고, 각 현안을 해결하는 데 정당 조직이 움직여 성과를 내면서 신뢰를 확보하기 어려운 구조다. 손 전 후보 등 여러 국민의힘 후보가 팽배한 정권심판론 속에서 활로를 찾기 위해 지역 현안 중심의 선거 캠페인을 전개했지만 대부분 성과를 내지 못한 이유다.

‘돈 안 드는 정치' 표방한 법 개정 이후

문제는 보수의 수도권 조직이 취약해진 주된 이유 중 하나가 현직에 유리한 정당법제에 있다는 점이다. 돈 안 드는 정치를 표방하면서 2004년 개정된 정당법이 지구당을 비롯한 지역 조직을 사실상 해체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당원협의회(또는 지역위원회)는 별도 법인격이 없는 협의체일 뿐이다. 유급 직원 수는 중앙당 150명, 당 지부(시도당) 5명, 지구당 2명에서 중앙당 100명, 당 지부 5명으로 줄었다. 직원 수 제한은 2000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은 정당법에서 정당의 조직 구성과 운영 방식을 획일적으로 규정하고 있어 모든 정당은 이를 따라야만 한다.

이 같은 정치개혁의 결과 현직 의원은 압도적 우위를 누리게 됐다. 국회의원은 8명의 보좌진(인턴 및 입법보조원 제외)을 활용해 지역구 및 조직 관리를 맡길 수 있다. 또 그가 공천권을 행사하는 지방의원(기초 및 광역의원)은 선거구 현안 사업을 진행하고, 자신만의 조직을 구축하고, 다음 선거를 대비해 정책 등을 개발한다. 지방의원이나 지방의원 지망자들이 만드는 당원 조직을 합산한 것이 곧 지역 조직이나 마찬가지다. 당원협의회는 상근 직원이 없고 별도 정치자금도 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총선에서 지역별 현안을 파악하고 공약을 개발하는 데 지방의원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반면 원외 당협위원장은 수중에 가진 게 전혀 없다. 알아서 당협을 운영해야 한다. 자기 돈을 들여 사무실을 빌리고 직원을 고용해야 한다. 해당 지역구에서 당선한 적이 있거나 비례대표 등 선출직 이력이 있으면 당시 보좌진으로 근무했거나 지방의원 공천을 받았던 이들의 협조라도 구할 수 있어 그나마 형편이 낫다. 돈이 있고 지역에서 조직을 꾸릴 수 있는 사람만이 원외 당협위원장을 맡는다.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제한된다. 선거에서 연거푸 패배하고, 선출직에 처음 도전하는 이들이 몇 달 전 부랴부랴 지역구를 정해 내려오는 경우라면 유권자의 마음을 얻기 쉽지 않다. 그 결과 '강한 정당이 더 강해지고, 약한 정당이 더 약해지는' 일종의 '마태 효과(Matthew effect)'가 발생하게 된다.

원칙과 기준 없는 개혁 담론의 결과

2004년 1월 13일 당시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이재오 위원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오세훈(왼쪽) 함승희(왼쪽에서 세 번째) 천정배(오른쪽) 의원 등 각 당 정개특위 간사와 정개특위 일정을 협의하고 있다. [동아DB]
역설적으로 지금의 정당법을 주도한 곳은 국민의힘의 전신인 한나라당이다.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거액의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차떼기' 사건이 발발한 시점은 2003년 말이다. 이로 인해 비판 여론이 끓어오르자 이듬해 1월 열린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 정당법과 정치자금법 개정안 등을 발의했다. 당시 여당도 대선에서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사실이 드러난 데다, 오랫동안 저비용 고효율 정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기 때문에 관련 법 개정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개혁안에 의원들의 반발은 크지 않았다. 현직의 우위가 강화됐기 때문이다. 정치자금의 경우 현역의원만 개인 소액 후원만 모금할 수 있게 됐다. 자산이 많거나 변호사·의사 등 전문직, 하다못해 종합편성채널(종편) 패널로 수입을 거둘 수 있지 않다면 원외 인사로 정치활동을 하기 어렵게 됐다. 기업이나 단체의 정치자금 후원은 금지되고 중앙당도 50억 원까지만 모을 수 있게 되면서 부패 가능성을 줄였다지만, 제3정당의 성장은 어려워졌다. 노조나 시민단체가 자금을 지원하거나, 대규모 조직을 갖고 있는 정당이 국회 밖에서 세를 불려가며 선거를 준비하는 경로가 봉쇄됐기 때문이다. 대신 정당 보조금이 늘면서 양대 정당은 국가에 의존하면서 그 일부분으로서 기능하는 '카르텔 정당'의 지위를 굳혔다. 새 인물이나 새 정당이 진입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계속됐지만 재개정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번 총선은 지난 20여 년간 진행된 일련의 정치개혁이 어떻게 기형적 정치 행태를 낳았는지 종합적으로 보여줬다, 지금의 정당 법제는 수도권에서 국민의힘 후보가 이기기 어렵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영남에서만 손쉽게 당선되는 국민의힘의 현주소는 보수의 고립을 심화시켰다. 호남에서 변변한 경쟁 세력이 없는 민주당은 불투명한 당내 경선 속에서 경쟁력 없는 후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또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별다른 보완 조치 없이 다시 시행되면서 비례 전용 위성정당이 만들어졌다. 정당의 핵심 기능인 후보자 공천은 대표성이 없고 책임도 지지 않는 위성정당에 하도급을 주게 됐다. 각종 부적격 논란이 있는 후보들이 제대로 걸러지지 않고 공천장을 받았다. 비례 의석을 노리는 경쟁 정당이 출현하는 걸 막기 위해 민주당은 연합정치시민회의라는 알 수 없는 기구를 만들었는데,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이름을 그대로 쓴 조국혁신당이 등장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국가보조금이 풍족하게 제공되자 정당들은 부담 없이 월 1000원을 6개월만 납부하면 경선 투표권을 주는 제도를 도입했다. 정치 엘리트들은 각 정당 지지자들을 자신에게 표를 던지는 당원으로 만들기 위해 선명성 경쟁을 펼쳤다. 이른바 '개딸(개혁의딸)' 등 특정 유력 정치인에게만 충성하는 새로운 형태의 정당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게 됐다.

이 같은 결과는 필연적이다. 현직 의원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의제가 설정되고, 손쉽게 통과됐다. 사후 적용 과정에서도 적극적인 규칙의 '해킹'이 시도됐다. 반면 정치개혁 의제가 어떠한 변화를 불러올지 제대로 된 시뮬레이션이나 영향 평가가 이뤄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기득권에 손해가 되기 때문이다. 원칙이나 기준에 관한 토론도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보수는 대개 '깨끗한 정치', 진보는 '정치적 소수의견도 대표자를 낼 수 있는 정치'를 내거는 정도에 그쳤다. 정치-선거 시장의 구체적 작동 방식, 정당 간 또는 정당 내 경쟁 강도, 그에 따른 신규 진입과 퇴출, 유권자의 편익 변화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다.

선거제도가 아니라 정당이 문제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건 선거제도 탓이 아니다. 정당이 유권자의 의사와 정치적 선호에 반응하지 않고 제대로 책임지지 않아서다. 정당 간 경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그나마 벌어지는 경쟁도 유권자의 진짜 이해관계와 선호를 반영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정치 시장(市場)의 주체인 정당의 변화를 꾀하지 않는 정치개혁은 제대로 된 성과를 내기 어렵다.

이탈리아의 경험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탈리아는 진보 진영 일각에서 바람직한 선거 방식으로 거론하는 개방형 정당명부 비례대표제(후보자 우선순위를 유권자 투표로 정하는 방식)를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봉쇄조항(의석을 배분받기 위한 기준선)도 없다시피 했다. 비례대표 앞 순번을 따내기 위한 정당 내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고, 조직표를 확보하기 위해 막대한 정치자금이 쓰였다. 기독교민주당이 연정을 주도해 장기 집권했지만, 소수 정당이 난립한 상황에서 안정성이 떨어졌다.

정치권의 심각한 부정부패가 대규모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나자, 1994년 총선부터 소선거구제(의석 중 25%는 권역별 비례)가 도입됐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포르자이탈리아, 부유한 북부 공업지대의 독립을 주장해 온 북부동맹, 네오 파시스트 정당인 민족동맹이라는 극우 내지 포퓰리즘 정당이 기민당의 빈자리를 대신했다. 베를루스코니는 2005년 폐쇄형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기반으로 승리한 선거 연합(이탈리아는 여러 정당이 선거 연합을 결성해 단일 명부를 만드는 방식이 일반적)에 55%의 의석을 주는 방식으로 선거법을 바꿨다. 민주당 주도의 진보 진영에서 2010년대 다시 선거법을 바꾸려 시도하다, 2017년에야 상·하원 각각 3분의 1가량은 소선거구제, 3분의 2가량은 비례대표제로 뽑게 됐다. 2022년에는 포퓰리즘 정당 오성운동 주도로 의석수를 3분의 2 정도로 줄였다. 선거제는 계속 바뀌었지만 정치는 나아지지 않고 포퓰리즘 정치만 날로 기승을 부리게 됐다.

정치개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경쟁 방식, 즉 정치 시장의 메커니즘을 바꿔야 한다. 선거구 단위의 경쟁 압력을 끌어올리고, 높아진 경쟁 압력이 유권자의 실익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그래야 개혁 의제에 대한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 먼저 지방의회부터 변화를 꾀할 필요성이 있다. 지역 정치인은 민원을 해결해 주고, 이를 바탕으로 자기 조직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활동한다. 국회의원이 예속되다시피 한 데다 굳이 같은 당 지자체장이나 다른 의원들과 갈등을 빚지 않기 위해서다. 다수 지역에서 지방의회는 특정 정당 일색이다. 높아지는 총선 투표율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인 지방선거 투표율은 지역 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효능감이 낮다는 걸 방증한다. 비례대표 비중을 늘리고 정당법 내 창당 요건을 완화해 지역정당(특정 지자체나 지방의회를 무대로 활동하는 풀뿌리 정치세력)을 허용해야 한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중대선거구 도입이나 비례대표 증가는 지역 정치가 독립적으로 활성화돼 지역구 국회의원에 대한 니즈가 줄어야만 가능해질 것이다.

아울러 획일적인 정당 조직 규제를 풀어야만 한다. 중앙당과 시도당의 인력 제한을 풀어 정당이 중심이 된 정치활동이 가능해야 한다. 2022년 기준으로 유급 직원 1명당 담당하는 당원 숫자는 더불어민주당 2만5900명(당원 수 485만 명), 국민의힘 2만7600명(당원 수 430만 명) 꼴이다. 양대 정당도 지금의 인력으로는 최소한의 당원 관리도 불가능하다. 또 당협 내지 지역위에 유급 직원을 두고, 원외위원장도 정치자금을 모집해 집행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반대급부로 출판기념회 등 감시의 사각지대였던 부분까지 회계 내역 공개 등을 통해 감시받도록 하면 균형이 맞을 것이다. 정치 시장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하자는 것이다.

제도적으로 보장된 복점적 정당 구도, 현직 의원에게 유리한 포지티브 규제를 깨뜨리는 것이야말로 정치개혁의 첫걸음이다. 정치개혁은 특정 제도를 도입해 달성되는 게 아니다. 정당 간 경쟁 구조에서 반응성과 책임성, 경쟁성과 투명성을 어떻게 높일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조귀동 ‘이탈리아로 가는 길’ 저자·정치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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