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폐소생술이 필요한 미국 민주주의···문제는 미국 헌법[책과 삶]

정원식 기자 2024. 5. 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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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440쪽 | 2만2000원
2021년 1월6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지지자들이 워싱턴 연방의회 의사당 건물에 난입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최근 미국 극장가에서는 지난달 개봉한 영화 <시빌워(Civil War·내전)>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영화는 종군기자(커스틴 던스트)의 시선을 따라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주별 연합군과 연방정부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상의 미국을 그려낸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황당한 설정’이라며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을 법한 내용이다.

지금 미국은 다르다. 2021년 1월6일 의사당 폭동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은 데다 오는 11월 조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대결을 앞둔 미국에서 정치적 분열에 의한 폭력 사태는 더 이상 불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다. 2022년 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43%가 향후 10년 이내에 미국에서 내전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시빌워>는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시 초래될 수 있는 분열과 혼란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지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영화 <시빌워>의 한 장면. AP연합뉴스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칭송받던 미국의 민주주의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하버드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함께 쓴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는 미국 양대 정당 중 하나인 공화당이 민주주의를 저버렸다고 단언한다.

1960년대 중반 공화당은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시민권법과 투표권법 개혁안 통과를 주도한 중도우파 정당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당 핵심 의원이 “자유와 평화, 번영과는 달리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대놓고 말하는 정당으로 변했다. 스웨덴 예테보리대학에 있는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는 2020년 미국 공화당이 튀르키예 집권당 정의개발당과 헝가리 집권당 피데스 같은 반민주적 정당과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미국 사회 인종구성의 변화에 따라 백인 기독교 남성의 정치·사회적 지위가 흔들리며 공화당은 퇴보하기 시작했다.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 이후 아프리카계와 히스패닉계 등 소수인종의 상승세에 위협을 느낀 급진적인 공화당 지지자들은 당을 ‘백인들의 분노’에 기반한 정당으로 몰고갔다. 기성 정치권의 아웃사이더였던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 같은 분노에 편승해 대통령이 됐다.

2020년 대선에서 민주당 바이든 대통령이 승리하면서 공화당은 더욱 급진화했다. 2021년 한 조사에서 공화당원 중 56%가 “전통적인 미국적 삶의 방식이 너무나 빨리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구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해 또 다른 조사에서는 공화당 의원 중 60%가 ‘민주주의 점수’에서 ‘F’ 학점을 받았다.

최근 몇십년 간의 선거 결과만 놓고 보면 미국 사회의 다수를 대변하는 정당은 공화당이 아니라 민주당이다. 예컨대 2016년 미국 대선의 경우 공화당 트럼프 후보 득표율은 46.09%인데 비해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 득표율은 48.18%로, 클린턴을 지지한 유권자들이 더 많았다.

문제는 반민주적 성향이 강화된 공화당이 미국 사회의 소수를 대변하면서도 그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1992년 이후 202년까지 30년 동안 치러진 8차례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가 민주당 후보보다 많은 표를 얻은 것은 2004년 대선뿐이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공화당 후보들은 세 번이나 대통령이 됐다. 이는 미국 대선이 더 많은 유권자들의 표가 아니라 더 많은 선거인단을 확보해야 승리하는 간접선거 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 대선에서 클린턴은 위스콘신주, 미시건주, 펜실베이니아주, 뉴욕주 등 4개주에서 총 160만표를 얻었으나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트럼프가 46대 29로 승리했다.

하원에 없는 필리버스터(의사진행 방해) 권한을 지닌 연방상원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주와 와이오밍주는 각기 인구가 3900만명과 57만명으로 68배나 차이가 나지만, 배정된 상원 의원 숫자는 똑같이 2명이다. 2020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들은 공화당 후보들보다 4150만표를 더 얻었지만, 실제 의석은 민주당 50석 대 공화당 50석으로 같았다.

최고법원인 연방대법원 대법관 구성도 다수 유권자들과 괴리돼 있다. 현재 대법관 9명 중 이념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3명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더 적게 받고도 대통령이 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들이다.

다수결을 핵심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처럼 소수 지배가 허용되면 다수 시민들의 삶이 타격을 받게 된다. “당파적 소수가 과잉대표권을 행사하도록 제도가 허용할 때, 여론은 외면과 억압”을 받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의 가장 첨예한 이슈 중 하나인 임신중지권과 총기규제 논란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2022년 6월 연방대법원은 여성들의 임신중지권을 보장해온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었다. 이보다 한 달 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임신중지에 반대하는 미국인은 39%에 불과했다. 엄격한 총기규제에 찬성하는 여론이 더 많은데도 상원에서 관련 입법 논의가 번번이 좌절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총기 소유 비중이 높은 주들의 인구보다 총기 소유 비중이 낮은 주들의 인구가 3배가량 많지만 양측의 상원 의석 수가 비슷해, 총기규제에 반대하는 여론이 과대대표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다수 여론을 반영하는 쪽으로 궤도를 수정한다. 그러나 공화당은 2018년 중간선거, 2020년 대선, 2022년 중간선거에서 거듭 실망스런 결과를 냈는데도 트럼프주의의 장악력이 커지는 극단화의 길을 가고 있다. 저자들은 이와 관련해 “공화당이 ‘전국 선거에서 다수를 확보하지 않고서도’ 권력을 차지하고 휘두를 수 있게 되면서, 그들은 미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변화에 적응해야 할 전반적인 동기를 상실해버렸다”고 설명한다.

저자들은 퇴행하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되돌리기 위해 세 가지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선 유권자 자동등록과 투표권 보장 입법 등 투표권 확립, 선거인단 제도 폐지와 비례대표제 도입 등 선거제 개혁, 상원 필리버스터 폐지와 연방대법관 종신제 폐지를 통한 다수 지배 강화가 그것들이다.

트럼프와 공화당은 미국 헌법에도 ‘불구하고’ 미국 민주주의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미국 헌법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저자들은 공화당이 “헌법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따라서 미국 민주주의를 구출하기 위해선 헌법 수정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미국 헌법은 민주주의 세상에서 가장 수정이 힘든 헌법이다.” 상원과 하원 양쪽에서 3분의 2 승인을 받아야 하고 전체 주의 4분의 3 승인도 필요하다. 31개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 수정 절차를 비교한 연구에서 미국은 2위(호주·스위스)와 큰 차이가 나는 1위를 기록했다.

저자들은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침묵”이라면서 당장은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민주주의 개혁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공론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 등 몇몇 민간기관에서 선거제 개혁 논의를 진행하고 있고, 백악관도 2021년 대법원 개혁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앞서 저자들은 트럼프 대통령 집권기였던 2018년 미국 민주주의 시스템의 취약점을 살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출간해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에 충격을 받은 미국과 전 세계 독자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미국에서 지난해 9월 출간된 이번 책에서 저자들은 “민주주의 생존을 걱정했던 미국인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하나로 뭉쳤고, 그래서 민주주의는 살아남았다”고 쓰고 있다. 다만 이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같은 해 11월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기 전의 평가다. 오는 11월 대선 결과에 따라 미국 민주주의는 또 한 번 중대한 고비를 맞을 수 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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