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에 구타당해 갈빗대 부러진 형, 6시간 기어서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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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수씨도 엊그제 형 옆으로 갔어. 부부가 거기서는 외롭지 않게 지내길 바라."
5·18민주화운동 44주기를 이틀 앞둔 16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는 먼저 간 가족을 그리워하는 유족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는 절을 마친 후 "형의 부인인 신양순 씨가 석탄일을 앞두고 세상을 떴다. 거기서는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길 바라"고 묘소에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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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뉴스1) 박지현 기자 = "제수씨도 엊그제 형 옆으로 갔어. 부부가 거기서는 외롭지 않게 지내길 바라."
5·18민주화운동 44주기를 이틀 앞둔 16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는 먼저 간 가족을 그리워하는 유족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항쟁 당시 16세로 계엄군에게 끌려가 맞은 후 후유증에 시달리다 사망한 박성수 열사의 동생 박성태 씨(77)는 묘소를 찾아 크게 절을 세번 올렸다.
바나나 두송이와 집에서 직접 만든 술 한 병을 형의 묘소에 올렸다.
박 씨는 형을 기리며 매년 묘소에 작은 술상을 차리고 있다.
박 씨는 "형이 조선대 체육관에서 계엄군에게 구타당했다"며 "갈빗대가 부러져 중흥동에 있는 집까지 6시간을 기어서 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박 열사는 돌이킬 수 없는 상해를 입고 15년을 병원 생활을 하다가 가세가 기울었다.
그는 절을 마친 후 "형의 부인인 신양순 씨가 석탄일을 앞두고 세상을 떴다. 거기서는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길 바라"고 묘소에 읊조렸다.
박찬 씨(40)도 국화 2송이를 손에 들고 익숙한 듯 빠른 걸음으로 외삼촌인 윤한봉 열사의 묘소를 찾았다 .
윤한봉 열사는 1974년 4월 박정희 정권의 유신에 반대한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 제적됐다.
이후 1980년 5월 민주화운동의 주모자로 수배돼 미국에 밀항했으며, 1993년 5·18 수배자 중 마지막으로 수배 해제됐다.
박 씨는 묘소 앞에서 신발을 벗고 절을 크게 두 번 올린 후 들고온 국화 1송이를 헌화했다.
그는 "광주에 살고 있기 때문에 외삼촌이 돌아가신 후 자주 와서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어 고모인 박기순 열사의 묘를 찾아 다른 국화 1송이를 헌화하고 절을 올렸다.
박기순 열사는 1978년 7월 들불야학을 창립해 노동운동을 하다 불의의 사고로 21살에 세상을 떴다.
묵념을 마치고 상념에 잠긴 채 묘비를 바라보던 박 씨는 신발 다시 신고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war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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