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툰이 그저 귀엽고 그리기 쉬운 만화라고? [K콘텐츠의 순간들]

조경숙 2024. 5. 17.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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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툰은 웹툰 탄생에 혁혁한 기여를 했다. 누군가는 생활툰을 그리기 쉬운 만화라고 폄하한다. 하지만 소소한 일상의 다정함과 평범함 속 차별을 끄집어내는 일이 쉬울 리 없다.
다시 연재 중인 <마음의 소리>(왼쪽)와 ‘고전 생활툰’ <낢이 사는 이야기>. ⓒ조석 인스타그램 갈무리, 네이버 웹툰 갈무리

생활툰이 돌아왔다. 인기작 〈마음의 소리〉가 다시 연재 중이고, 10년 전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킨 〈선천적 얼간이들〉은 최근 시즌 2 연재를 마쳤다. ‘고전 생활툰’이 귀환한 데 이어 저마다 참신한 소재를 다루는 신작 생활툰도 늘어났다. 청소년 학생들과 학원 선생님의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그린 〈K학원 생존기〉,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들려주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이집 생활툰 〈어린이집 다니는 구나〉,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자유분방하게 오가는 19금 로맨스 생활툰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 뮤지션〉 등. 아주 오랜만에 목도하는 생활툰 풍년이다.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본래 생활툰은 웹툰의 시작을 견인한 장르였다. 최초의 웹툰이라고 평가되는 작품 〈스노우캣〉도 작가의 개인 홈페이지에서 연재되었던 생활툰 장르 작품이다. 네이버웹툰, 다음 만화속세상 등 포털사이트에서 웹툰 서비스를 개시했을 때도 〈마음의 소리〉 〈낢이 사는 이야기〉 등 소소하면서도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생활툰 작품이 간판을 장식하곤 했다. 1990년대를 풍미한 만화들처럼 광활한 세계관과 기나긴 서사를 지닌 장편 작품이 아닌, 비교적 호흡이 짧고 간명한 생활툰이 웹툰의 포문을 연 것은, 웹이라는 공간과도 관련이 있다. 용량이 큰 이미지를 많이 전송하지 않으면서(초창기 웹은 전송속도가 매우 느렸다), 연재작을 중간부터 읽기 시작하더라도 금세 따라잡을 수 있는 서사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초창기 웹툰 서비스는 지금과 같은 유료 구매가 아니라 사용자의 접속 트래픽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폭넓게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생활툰이 안성맞춤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이 시기의 생활툰 작품들을 무척 사랑했다. 무엇보다 이 작품들이 나의 협소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포털에서는 처음으로 성소수자의 일상을 다룬 레즈비언 생활툰 〈모두에게 완자가〉, 청각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그린 〈나는 귀머거리다〉, 카페를 연 자영업자의 고군분투가 고스란히 담긴 〈안녕 외롭고 수상한 가게〉, 소박한 일상을 다정한 시선으로 조명하는 〈어쿠스틱 라이프〉까지. 내가 타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줄로만 알았는데, 도리어 그의 시선에 내가 동화되었다. 생활툰을 본다는 건, 그의 시선을 빌린다는 것이며, 이윽고 새로운 의견마저 갖게 되는 일이 분명했다. 나는 생활툰이라는 액자를 통해 그들이 내건 삶의 단편들을 보면서 같이 분개하고 공감하고 슬퍼했다. 그게 마치 내 삶인 것처럼.

누군가의 시선을 좇다 보면, 우리가 여태 알지 못했던 것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나는 귀머거리다〉를 읽으며, 정작 한국에서 제작한 영화는 청각장애인들이 보기 어렵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수입한 영화에는 항상 자막이 달려서 청각장애인도 영화를 보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지만, 한국어로 연기하는 영화에는 자막이 달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청각장애인들은 정작 한국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없었다. 이런 장면을 마주하자, 이후로는 극장에 갈 때마다 자막이 있는지 없는지를 눈여겨보게 됐다. 마침 지난해부터는 공중파 드라마와 한국 영화에도 부분적으로나마 자막이 도입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웹툰 플랫폼으로 ‘돌아온’ 생활툰

하지만 웹툰의 주요 수익모델이 트래픽이 아니라 유료 콘텐츠 구매로 변화하면서, 생활툰도 차츰 자취를 감췄다. 다음 회차를 유료로 구매하게 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생활툰보다 뒷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함을 자아내는 장편 서사 작품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대학일기〉 〈퀴퀴한 일기〉 〈모죠의 일지〉 등 주옥같은 작품이 생활툰 자리를 지키기는 했지만, 유료 콘텐츠 구매가 자리 잡고 나서는 수백 개 연재작 가운데 생활툰 장르의 작품은 열 개 내외로 그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때 생활툰은 새로운 공간에서 자신만의 활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바로 SNS에서였다. 생활툰은 이미지 기반 SNS인 인스타그램에서 ‘인스타툰’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고 연재되었다. 특히 픽션에 기반한 형태의 생활툰 〈며느라기〉가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에서 대성공을 거둔 것이 향후 인스타툰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누구나 연재할 수 있는 SNS 안에서 사람들은 종래의 웹툰 서비스에서보다 더 많은 생활툰을 향유할 수 있었다. 웹툰 서비스 안에서 유료 콘텐츠 구매 수익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생활툰은 SNS에서 다시 이전처럼 수많은 트래픽을 만들어내고 수십만 팔로어를 거느리며 작품을 선보였다. 환경문제를 주로 다룬 ‘기후위기 인간’(@climate.human), 1990년대 초등학생들의 서사를 그린 ‘틴틴팅클’(@luv_nan), 데이트폭력 피해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다이아리’(@i_iary) 등 생활툰이 당초 등장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SNS에서도 폭넓은 주제와 이야기를 다뤘다.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 때로는 미래까지도. 혹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 현존하지 않는 가상 인물의 일상 등, 생활툰의 시도는 더 폭넓고 다채로운 방향으로 이어졌다.

<며느라기>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거머쥐며 인스타툰의 성장에 기여했다. ⓒ카카오페이지 제공

새로운 우주에서 자신만의 항로를 개척하던 생활툰이 다시 웹툰 서비스로 돌아오게 된 것도 이러한 시도 덕택이다.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가 주요 웹툰 채널 중 하나로 부상하자, 위기감을 느낀 네이버웹툰도 다시 생활툰을 유치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네이버웹툰 〈마님이네 미국 시골집 이야기〉 〈유부 감자〉의 작가들은 SNS에서 생활툰을 연재하며 크게 인기를 얻은 이들이다. 인기 많은 이들의 작품을 서비스 안에 들여옴으로써 다시 독자들을 웹툰 서비스 안으로 끌어모으고자 했다.

웹툰의 탄생에 혁혁한 기여를 했던 생활툰은 그사이 인스타툰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다시 웹툰 플랫폼 안으로 돌아왔다. 이 모든 건 생활툰을 집요하게 그려내고 있는 창작자들이 오래 고민하고 실험하며 만들어온 공동의 결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활툰을 그저 귀엽기만 한, 그리기 쉬운 만화라고 폄하하곤 한다. 그러나 날것의 일상에서 특정한 부분을 포착하고 알알이 닦아 말끔하게 내놓는 일을 쉽다고 보긴 어렵다. 게다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소소한 일상 아래의 다정함과 평범함 속의 차별을 세심하게 끄집어내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생활툰의 일이었다. 나는 독자의 특권으로 그 시선들을 기꺼이 좇아간다. 이번에는 어디로 향하게 될지, 그 모험에 잔뜩 들뜬 채로.

조경숙 (만화 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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