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추어진 기원으로서의 섹스를 찾아 [책&생각]

최재봉 기자 2024. 5. 17.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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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침' '은밀한 생'의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가 2007년에 낸 '성적인 밤'은 여러 모로 독특한 책이다.

제목에서 짐작되듯 책은 에로티시즘을 주제로 삼은 그림과 그 그림들을 소재로 삼아 펼치는 키냐르의 사유를 담은 일종의 미술 산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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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오노레 프라고나르, ‘빗장’, 1777. 난다 제공

성적인 밤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l 난다 l 2만8000원

‘세상의 모든 아침’ ‘은밀한 생’의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가 2007년에 낸 ‘성적인 밤’은 여러 모로 독특한 책이다. 가로로 긴 판형, 검은 종이 위에 흰 글자로 인쇄된 본문, 어둠 속 유령처럼 출몰하는 190여 개의 그림들로 이루어진 이 책이 원저의 형태를 유지한 채 번역 출간되었다.

제목에서 짐작되듯 책은 에로티시즘을 주제로 삼은 그림과 그 그림들을 소재로 삼아 펼치는 키냐르의 사유를 담은 일종의 미술 산문집이다. 남녀의 성기는 물론 성교 장면을 과감하게 담은 유럽의 그림들에 한·중·일의 춘화까지 포함돼 사뭇 어지러운데, 키냐르의 난해한 문장이 독자의 흥분을 가라앉힌다. “내가 수태되었던 밤, 나는 거기 없었다.” “당신보다 앞서 있는 날을 목도할 수는 없는 일이다.” 머리말에서 강조되는 것은 성적 희열로서의 에로티시즘이 아니라 감추어진 기원으로서의 성교다. 성 또는 성교를 가리키는 섹스(sex)의 라틴어 어원이 분리를 뜻한다는 사실은 사태를 더 힘들게 한다. 성교란 분리되었던 두 성이 결합하는 것이지만, 그 결과 수태된 아이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빠져나오는 출산은 또 다른 분리를 낳는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모의 성교라는 원초적 장면이 우리의 기원을 이루며, 그 기원을 헛되이 찾아 헤매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얼굴과 머리 전체에 흰 천을 둘러쓴 남녀의 키스를 그린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들’을 제시하고는 “다른 성기는 영원히 알 수 없을 뿐”이라 적는 데에서 보듯, 그림에 대한 충실한 설명이라기보다는 그림을 매개로 키냐르 자신의 독특한 사유와 문장을 전개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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