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간 분장하고 찍다 이젠 AI가 표정 구현... 혹성탈출 유인원의 진화

백수진 기자 2024. 5. 17.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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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간 10편 ‘혹성탈출’ 시각 특수 효과 변천사
유인원 제국을 건설한 악당 프록시무스는 인간의 기술을 배워 문명을 발전시키려 한다. 프록시무스 역을 맡은 배우 케빈 두런드는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를 보고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1968년 영화 ‘혹성탈출’ 배우들은 최대 6시간 동안 메이크업을 받고, 유인원 분장을 유지한 채 종일 촬영해야 했다. 그로부터 56년 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2024)에선 AI가 배우의 연기를 학습해 디지털 캐릭터에 구현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혹성탈출 시리즈는 당대 기술력의 정점을 보여주며 할리우드의 시각 특수 효과(VFX) 발전을 이끌어왔다. 특수 분장부터 AI까지, 혹성탈출 속 유인원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돌아봤다.

그래픽=정인성

56년간 총 10편의 영화가 나온 혹성탈출 시리즈는 진화한 유인원과 퇴화한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를 조금씩 변주해 가며 보여준다. 1960~1970년대 오리지널 시리즈에선 최대 100명의 특수분장사가 투입돼 배우의 얼굴을 침팬지·오랑우탄·고릴라로 분장했다. 특수 분장을 총괄한 존 챔버스는 재료까지 직접 개발해 가며 정교한 유인원 분장을 만들어냈고, 1982년 아카데미 분장상 부문을 제정하는 계기가 됐다. 출연 배우들은 촬영 내내 분장을 지우지 못했는데, 식사 시간이 되면 침팬지는 침팬지끼리, 고릴라는 고릴라끼리 자연스럽게 종별로 나뉘어 먹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2011년 리부트 시리즈의 첫 작품인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부터는 모션 캡처 기술로 특수 분장이 필요 없어졌다. 배우의 신체 관절과 얼굴 근육에 센서를 부착해 움직임을 기록하고, CG로 유인원의 얼굴과 몸을 입히는 기술이다. ‘반지의 제왕’의 골룸, ‘킹콩’의 킹콩 등으로 모션 캡처 연기의 일인자로 불린 배우 앤디 서키스의 열연이 돋보였다. 유인원들의 리더 시저 역을 맡은 서키스는 표정과 몸짓만으로 인간과 유인원 사이에서의 고뇌를 표현하며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혹성탈출 :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 노아(왼쪽).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달 초 개봉한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리부트 시리즈의 4편이자, 전편 이후 7년 만의 후속작이다. 진화를 거듭한 유인원의 영어가 유창해지면서, 말할 때 입 주변의 근육 움직임까지 자연스럽게 구현됐다. 유인원의 표정도 인간과 더 가까워졌다. 죄책감과 당혹감 같은 미묘한 감정까지 풍부하게 드러났다.

딥페이크나 머신 러닝 같은 인공지능(AI) 기술도 활용됐다. AI가 배우의 연기 데이터를 학습해 가상의 캐릭터에 적용해 놓으면, VFX 아티스트가 이를 섬세하게 다듬는 식이다. VFX를 담당한 웨타 FX의 김승석 페이셜 모델러는 내한 간담회에서 “AI로 인해 아티스트는 창의적이고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에서 주인공 노아의 조력자인 오랑우탄 라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4편은 앞선 3부작의 주인공 시저가 죽고 300년이 지난 시점이 배경으로 새로운 주인공 노아(오언 티그)가 등장한다. 제국을 건설하려는 프록시무스 군단이 노아의 부족을 습격하고, 노아는 포로로 끌려간 친구와 가족을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노아의 조력자인 오랑우탄 라카의 뒤엔 한국인 제작진이 있었다. 표정을 전문으로 만드는 김승석 페이셜 모델러는 “감정별로 쓰는 얼굴 근육이 다르기 때문에, 근육을 분류한 다음 표정을 만들어갔다. 배우 특유의 웃음, 고유한 주름의 패턴도 유인원 얼굴에 녹였다”고 설명했다.

배우의 연기가 밑바탕이 되기 때문에, VFX에 가려진 배우들의 공도 크다. 노아 역을 맡은 배우 오언 티그는 침팬지로 완벽 변신하기 위해 “6주 동안 ‘유인원 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유인원 학교는 영화사가 혹성탈출 출연진을 위해 만든 훈련 과정으로 배우들은 특수 제작한 목발을 착용하고 유인원처럼 걷고, 소리 내고, 행동하는 수업을 받았다.

기술은 진보했지만, 이야기는 한 발짝 퇴보했다. 어리지만 용감한 주인공이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영웅으로 성장하는 전형적인 서사로 새로운 한 방이 없다. 인간보다 나은 유인원과 짐승만도 못한 인간의 대비로 재미를 준 전작들과 달리, 이번에는 유인원끼리의 갈등에 집중하면서 혹성탈출 시리즈만의 매력이 반감된 점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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