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휘의 시네필] 1000만 영화는 자란다, 한국사회의 불우함을 먹고

조재휘 영화평론가 2024. 5. 17.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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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가 성공을 거둔다면 일단 그것은 사회적인 사건이다. 영화의 질은 부차적인 문제다.' 누벨바그의 시대를 이끌었던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1932~1984)가 한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의 한국영화계는 좋은 영화들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일까? 의견의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서울의 봄'과 '파묘'는 작가적 의도가 장르적 완성도와 적절한 균형을 이룬 웰메이드의 본보기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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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가 성공을 거둔다면 일단 그것은 사회적인 사건이다. 영화의 질은 부차적인 문제다.‘ 누벨바그의 시대를 이끌었던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1932~1984)가 한 말이다. 오늘날 한국영화의 지형을 설명함에 있어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나는 알지 못한다. ’서울의 봄‘(2023)과 ’파묘‘(2024)가 연이은 1000만 관객을 기록하며 극장이 소생한다는 식의 말이 넘쳐났지만, 단기적인 흥행에 쏟아지는 관심과 열광, 시장주의의 언어는 정작 바닥이 무너지고 기울어져가는 현실의 음울한 이면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영화 ‘범죄도시4’ 스틸컷.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잘 만든 영화가 성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의 한국영화계는 좋은 영화들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일까? 의견의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서울의 봄’과 ‘파묘’는 작가적 의도가 장르적 완성도와 적절한 균형을 이룬 웰메이드의 본보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범죄도시 4’(2024)는 어떠한가? K-콘텐츠 운운에서 잘 드러나듯, 한국 영화계의 비극적 풍경 중 하나는 상업적 성공이 곧 예술적 가치의 척도라는 식의 천박한 인식이 당연하다는 듯 만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극장의 양극화와 다양성의 실종이라는 상식적인 얘기를 재삼 꺼내고자 하는 건 아니다. 결이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먼저 인용한 트뤼포의 말마따나 한국영화에서 작품의 질은 조금 거드는 역할일 수는 있어도 폭발적인 성공의 핵심은 아닐지 모른다. 작품 자체의 내적 요인보다는, 영화가 대중과 현실의 민감한 지점을 건드리면서 촉발한 징후적인 사건으로 보는 편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지 않고서는 ‘젠틀맨’(2022)이나 ‘거미집’(2023)과 같은 몇몇 수작의 실패를 설명할 길이 없다. 웰메이드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이다.

한국에서 ‘괴물’(2006)이나 ‘1987’(2017)처럼 1000만, 혹은 그에 가깝게 흥행한 영화의 조건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역사와 현실의 어두운 풍경, 불쾌한 기억(Trauma)을 대중의 정념에 부합하게 세련된 장르적 리얼리티로 재가공해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의 봄’과 ‘파묘’는 신군부 독재와 일제강점기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익숙한 구도이지만 동시에 참신해보여야 한다는 모순된 욕망의 지점을 파고들었다. 두 영화가 극장가를 휩쓸고 얼마 후, 정치권에선 보수 진영이 총선에 참패했다. 대중의 정서와 인식을 공유하지 않고 흐름을 역행하는 여당에 민심은 투표로 응답했다.

‘범죄도시 4’는 이전의 시리즈를 파편으로 쪼개 난삽하게 기워 맞춘 콜라주 같다. 그럼에도 영화가 흥행몰이를 하는 건 영화가 폭력의 형태로 손쉬운 해결의 판타지를 안겨주며 법질서의 정상적 작동이 멈춰버린 현실에서 느끼는 대중의 정치적 무력감에 내밀히 조응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한국사회의 합리성을 믿지 않게 된 불안한 대중은 초법적인 힘의 개입을 갈망하며 마석도의 주먹에서 위안을 찾는다.


영화는 우리 시대의 거울이다. 공교롭게도 이상의 영화들은 작중에서 실패하든 성공하든, 끝끝내 해결되지 못하는 역사와 현실의 답답함에 출구를 제시하려 한다는 태도에서 공통된다. 병든 사회의 불우(不遇)를 양분 삼아 1000만 영화는 자란다. 마치 간염에 걸려 한껏 부풀어 오른 비대해진 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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