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왜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나?

유석재 기자 2024. 5. 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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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에게 항변한 子遊는 21세기를 어떻게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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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에이 게임 '삼국지 12'에서 묘사된 화웅.

‘논어’ 양화편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子之武城, 聞弦歌之聲. 夫子莞爾而笑, 曰: “割鷄焉用牛刀?” 子游對曰: “昔者偃也聞諸夫子曰: ‘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 子曰: “二三子! 偃之言是也. 前言戱之耳.”

(자지무성, 문현가지성. 부자완이이소, 왈: “할계언용우도?” 자유대왈: “석자언야문저부자왈: ‘군자학도즉애인, 소인학도즉이사야.’” 자왈: “이삼자! 언지언시야. 전언희지이.”)

공자께서 무성에 가셨을 때 현악기에 맞춰어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선생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닭을 잡는 데 어째서 소 잡는 칼을 쓰느냐?”라고 하시자 자유가 대답했다. “옛날에 저는 선생님께서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쉽게 (남을) 부리려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얘들아! 언(자유)의 말이 옳다. 내가 좀 전에 한 말은 그를 놀린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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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는가’라는 유명한 말을 많은 사람들이 ‘삼국지’, 즉 ‘삼국지연의’에서 나온 말로 기억합니다. 제후 연합군이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사수관으로 진군하자 동탁의 양자 여포가 나가 이들을 막으려고 하는 시점에서 그 부하 화웅이 앞으로 나와 이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닭 잡는 칼’인 내 정도 선에서 충분하니 ‘소 잡는 칼’인 여포 장군은 나서지 말라는 얘깁니다. 여러 장수들과 싸워 이겨 무공을 떨친 화웅은 갑자기 나타난 연합군 측의 듣도보도 못하던 장수에게 한칼에 목이 달아나는데… 술 한 잔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베고 돌아간 그 장수는 다름아닌 관우라는 얘기였죠. 실제 역사에선 화웅이 손견의 군대와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나오지만,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어쨌든.

‘논어’를 보면 공자 자신은 천하를 주유하면서도 끝내 등용되지 못했지만, 그의 제자들은 각국의 요직으로 많이 진출했습니다. 당대의 지식을 결집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인재인 사(士)들이었기 때문이었죠. 심지어 당시 노나라의 실권자였던 계씨가 공자를 만나 제자들에 대해 물어보는 취업박람회 같은 장면도 나옵니다. 그런데 제자 자유만은 고작 읍(邑)의 지방관에 머무르고 있다니, 공자는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예악(禮樂)으로 인정(仁政)을 베푸는 이 중요하고도 아름다운 일을 고작 시골 마을에서 펼치고 있다니? 어찌 너 같은 ‘소 잡는 칼’이 닭이나 잡고 있단 말이더냐!

그러나 자유는 항변합니다.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한다고 배웠다’는 말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었을 겁니다. 저는 배운 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천하에서 크게 정치를 하든 작은 마을에서 작게 정치를 하든 다 소중하고 뜻 깊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배운 대로 제 길을 걸어가면 되는 것일 뿐, 소 잡는 칼 닭 잡는 칼이 어찌 따로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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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1세기에 누군가 여전히 고전(古典)을 붙잡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호고적 취향이기 때문인 걸까요?

복고(復古), 수구(守舊), 호고(好古). 그 달콤한 말들… 자신을 영속히 지켜줄 수 있을 것같은 빛나는 어휘들임에 틀림없습니다.프로이트의 ‘자기방어기제’(Self-defense Mechanism) 중에서도 단연 광채를 띠는 아름다운 퇴행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남대천으로 돌아가고픈 연어의 꿈을 망망한 태평양 한가운데서 가슴 한 구석에 고스란히 간직한 욕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불가능한 세계일뿐더러 조금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돌이켜 보면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거의 무비판적으로 계승됐던 성리학, 주주(朱註)로 대표되는 고답스런 담론들, 그 시효는 19세기에 이미 종언을 고했습니다. ‘그 시대’ 만큼은 그 치세와 경륜의 역할을 나름대로 수행했을 지 몰라도, 갑오경장 이후 유학은 지배적 지위를 상실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유가(儒家)의 고전을 읽는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유학은 결코 주자의 유학만도, 퇴계의 유학만도, 성리학의 유학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해석과 각주의 도그마는 고전을 보는 우리의 눈을 너무나 가려 놓은 것이 아닐까요.

그 입장, 아, 치밀어오르는 복고의 입장. 19세기 질서로 회귀하고자 하는 충효사상의 입장. 상명하복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동어반복의 세계. 우리가 지금 다시 읽는 고전은 그런 세계로의 회귀일 수 없습니다.

후세의 왜곡과 권위를 벗어던진 공자의 말 그대로의 논어, 시대와 공간의 콘텍스트 속에서 한 정치적 인간으로 다가오는 맹자, 우주론과 처세술의 미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대학과 중용. 이 텍스트들은 몇 천년의 시대를 뛰어넘어 자본주의 현대에 살고 있는 바로 이 자리의, 지금의 모습 그대로의 우리들에게 미래지향적인 가르침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공자는, 물론, 일류를 지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제자들이 각 제후국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길 바랬죠. 작은 시골의 읍재로 간 제자에게 “어찌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는가?”라 탄식한 것은 제자가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자는, 자기통일성과 성실의 길을 걸어 나라와 천하를 구하고 바꿀 수 있다면 자신의 출세는 저절로 따라오는 부수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사회를 바로 세우는 일이 곧 나를 바로 세우는 길이란 것입니다. ‘나’라는 개인의 확장이 ‘사회’이고, ‘천하’라고 봤습니다. 이 같은 세계관에선 사회에 해를 끼쳐가며 일신의 영화를 추구하는 자들은 당연히 ‘소인’으로 배척됐지요. 그 ‘일류’가 된 군자(君子)의 모습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공자의 ‘할계 언용우도’란 농담에 정색하고 반박한 제자 자유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일까요.

명품을 소비하고 VIP로 대우받는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성공한 삶’이 아니라

무덤 앞에 세울 비석에 써 놓을 관직들을 많이 확보한 ‘존경 받는 삶’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부분은 유기적인 통일체의 일부였다”라던 게오르그 루카치의 말과 같이

어느 늙은 날 벤치에 앉아 가만히 지난날을 되새겨 볼때

내 인생의 ‘성공’의 방향이란

사회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거스르지 않고 가는 길이다…

적어도,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려[克己復禮] 부단히 노력하려고 애쓰는 길이다…

과거의 구습을 되밟고 기존의 특권들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워지려는 자세로 인간의 마음을 가진 ‘쇄신’의 방법론을 따르는 길,

수없는 좌절과 회의와 고뇌의 밤들을 거쳤어도

나의 길은 그곳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길이다… 최소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은 대학을 졸업할 무렵 노트에 끄적거렸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돌아보면 이 치기(稚氣) 넘치는 내용대로 세상을 살기는 어려웠고, 평범한 삶조차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동물원의 노래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의 가사처럼 어딘가 있을 무언가를 아직 찾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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