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 (123) 수원 화성 서장대

기자 2024. 5. 16.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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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통팔달한 산’ 팔달산에 오르니 정조 대왕의 호령 소리가 들린다
화성 서장대 1971년. 셀수스 협동조합 제공
화성 서장대 2024년. 셀수스 협동조합 제공

두 사진은 경기 수원에 있는 화성(華城) 서장대(西將臺)의 1971년과 2024년의 모습이다.

화성은 당대의 지식과 기술이 집약된 한국 최고의 성으로, 정조(正祖)가 1794년 쌓기 시작하여 2년반 만에 완성하였다. 정조는 경기 양주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명당으로 알려진 수원 읍치 인근으로 이장하면서, 화성이라는 유례없는 계획도시를 만들어 수원 관아를 이전하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화성은 정조의 지극한 효심이 낳은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수도 남쪽을 지키는 국방 요새이기도 했던 화성은 해발 146m의 팔달산에 의지하여 쌓았으며, 둘레는 6㎞에 약간 못 미친다. 서장대는 화성의 가장 높은 부분인 팔달산 정상에 군사지휘소로 사용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화성에는 2곳의 장대(將臺)가 있다. 동쪽에 있는 동장대(東將臺)는 군사지휘소이자 군인들이 무예를 수련하는 장소여서 연무대(鍊武臺)라고도 하였다.

서장대가 세워진 팔달산은 높지 않으나, 평지 가운데 솟아 있어 정상에 오르면 시야가 탁 트여 사방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산 이름도 이렇게 “사통팔달한 산”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그래서 서장대에서는 성의 안팎이 한눈에 들어오며, 멀리 용인 석성산 봉화와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 입구까지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조는 1795년 융릉 참배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훈련을 직접 지휘하였으며, ‘화성장대(華城將臺)’라고 직접 쓴 현판을 걸었다. 화성의 시설물 가운데 정조가 직접 쓴 글씨가 걸려 있는 건물은 서장대가 유일하다고 한다.

사진을 보면, 서장대는 2층의 누각이다. 1971년 사진에 서장대 왼쪽에 탑처럼 보이는 구조물은 공격해 오는 적을 향해 높은 위치에서 기계식 활인 쇠뇌를 쏠 수 있는 노대(弩臺)이다. 2024년 사진에는 나무가 우거져 노대가 보이지 않으나, 서장대와 그 주변이 말끔하게 정비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서장대는 2006년 취객의 방화로 훼손되었다가 이듬해 복원되었다. 화성은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잘 관리되고 있다. 조금 아쉬운 점은 꼭 이런 곳에까지 설치해야 했는지 의문이 드는 정면에 보이는 운동기구이다.

* 이 칼럼에 게재된 사진은 셀수스 협동조합 사이트(celsus.org)에서 다운로드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정치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지리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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