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앱등이’의 추억 [슬기로운 기자생활]

박지영 기자 2024. 5. 16.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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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앱등이'(애플+곱등이)를 자처하며 애플 제품들을 사 모았었던 적이 있다.

소위 애플의 힙하고 젊은 이미지에 예술가들의 기여가 적지 않은데, 이들을 상징하는 도구를 짓누르는 방식으로 자신들 제품의 우수함을 알리는 게 "오만하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엘지의 16년 전 광고가 아닌, 유독 지금의 애플 광고에 분개하고 비판적인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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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아이패드 프로 광고 갈무리

박지영 | 빅테크팀 기자

한때 ‘앱등이’(애플+곱등이)를 자처하며 애플 제품들을 사 모았었던 적이 있다. 13년 전 다녔던 재수학원에서 고등학교 3학년 현역 때보다 ‘수능을 잘 봤다’며 300만원 정도의 성적 장학금을 받은 게 시작이었다. 당시 연극영화학과 입학을 앞둔 나는 “영화 편집에 맥북은 필수”라는 선배들 말을 듣고 200만원 정도 하던 값비싼 맥북을 그 돈으로 덥석 구매했다. ‘사과 로고 박힌 노트북은 선배들의 허세 아닌가’ 반신반의하며 학과 생활을 시작했다. 한 학기쯤 지났을까. ‘맥북은 필수’라던 그들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지금처럼 손쉽게 영상을 편집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없던 당시에는 애플이 개발한 맥(Mac) 운영체제 전용 프로그램 ‘파이널 컷 프로’를 주로 사용해야 했다. 물론, 학교 편집실에도 영화 편집을 지원하기 위해 맥 컴퓨터 10여대가 설치돼 있었다. 하지만 단편영화 과제 제출 마감 기간이 닥치면 선후배 할 것 없이 맥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했고, 무엇보다 영상 편집이 일상인 학과 생활에 맥북의 필요는 절실했다. ‘너무 비싸다’며 끝까지 맥북 구매를 망설였던 친구들도 하나둘씩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맥북을 마련했다.

독자 운영체제와 모바일 기기 호환으로 구축된 애플의 ‘폐쇄적 생태계’에 갇혀 살던 대학 시절이 떠오른 건, 지난 8일 공개된 애플의 새로운 아이패드 광고 ‘크러시’(Crush)를 보고 나서였다. 거대한 유압 프레스가 피아노, 물감, 메트로놈, 카메라, 기타 등 예술·창작 활동의 도구와 산물들을 짓눌러 파괴하고, 마지막 남은 자리에 아이패드 프로를 등장시키는 1분7초짜리 영상이다. 있는 돈 없는 돈 모아 맥북, 아이패드를 사고 애플 기기에서만 호환 가능한 프로그램들을 활용해 영화를 만들던 동료들이 떠오르자 씁쓸함이 밀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소문난 ‘애플 추종자’이자 지금도 영화를 만들고 있는 한 선배는 “이번 영상은 솔직히 불쾌했다”고 말했다. 소위 애플의 힙하고 젊은 이미지에 예술가들의 기여가 적지 않은데, 이들을 상징하는 도구를 짓누르는 방식으로 자신들 제품의 우수함을 알리는 게 “오만하다”는 것이다. 애플은 해당 영상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자 “죄송하다”며 계획했던 텔레비전 광고를 취소했다고 밝혔다.

유압 프레스로 악기, 카메라, 물감 등을 짓누르는 콘셉트의 광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6년 전 엘지(LG)전자가 공개한 스마트폰(KC910 르누아르) 광고도 이번 애플 광고와 상당히 유사하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시대를 또 앞서간 엘지”, “엘지를 따라 한 애플”이라며 해당 광고가 다시 주목을 받는다.

예술가들이 엘지의 16년 전 광고가 아닌, 유독 지금의 애플 광고에 분개하고 비판적인 이유는 뭘까. 창의적 도구를 제공하겠다며 예술가들을 ‘폐쇄적 생태계’ 안으로 끌어들인 애플이 이제는 예술가를 인공지능(AI)이 대체하거나 사라질 대상으로 여겨서는 아닐까. 가뜩이나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예술가들의 일자리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애플의 광고는 이들의 두려움과 분노를 증폭시켰을 것이다. 애플이 예술가들의 원석 같은 창의성을 더욱 빛나게 해줄 진정한 혁신을 보여줄 수 있기를, 한때 애플의 충성 소비자였던 시절을 떠올리며 바라본다.

jy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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