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옥시토신은 어쩌다 사랑의 호르몬 됐나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2024. 5. 16.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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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바소프레신과 옥시토신은 진화생물학 용어로 굴절적응(exaptation)의 예다. 굴절적응은 이미 존재하는 물질이나 회로를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 래리 영 & 브라이언 알렉산더, '끌림의 과학'에서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5월에 어울리는 꽃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많은 사람이 장미를 떠올리지 않을까. 실제 5월에는 전국 곳곳에서 장미축제가 벌어진다. 흥미롭게도 장미는 '꽃의 여왕'이라고도 불린다. 그렇다면 5월의 호르몬은?

아마도 많은 사람이 옥시토신을 떠올릴 것이다. 사랑의 호르몬이라고 부르는 옥시토신은 가정의 달 5월과 가장 어울리기 때문이다. 모성애뿐 아니라 부부간의 사랑 같은 유대 형성에 옥시토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옥시토신이 유명세를 탄 건 1990년대 초원들쥐 연구 결과가 널리 알려지면서부터다. 초원들쥐는 사람처럼 일부일처제로 가정을 이루고 사는데(포유류에서는 예외적인 경우다) 알아보니 옥시토신이 원동력인 것으로 밝혀졌다. 암컷에게 옥시토신을 투여하면 짝짓기를 하지 않은 낯선 수컷에게도 애착을 보이며 친근하게 굴었다. 

2000년대 초 옥시토신을 탄 용액을 콧속에 뿌리면 뇌혈관으로 들어가는 현상이 발견되면서 사람을 대상으로 옥시토신 효과를 보는 실험이 진행됐고 남녀 관계를 비롯해 유대 형성에 도움이 된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옥시토신의 명성은 더 확고해졌다. 물론 유의미한 효과가 없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언론에서 잘 다루지 않아 옥시토신이 대중에게 과대평가된 면이 있다. 

그런데 지난 1월 학술지 '네이처'에는 좀 이상한 논문이 실렸다. 우리 몸의 지방조직에 저장된 중성지방을 자유 지방산으로 분해하는 과정에 옥시토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옥시토신의 역할은 다양하다. 20세기 초 분만을 촉진하는 호르몬으로 발견된 뒤(옥시토신(oxytocin)은 '빠른 출산'이란 뜻의 그리스어다) 젖이 나오게 하는 역할이 밝혀졌다.

모성애와 부부애 같은 유대를 촉진하는 역할은 한참 뒤 밝혀진 것이다. 여기까지는 번식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기능이라 그러려니 했지만 지방분해에도 관여한다는 건 좀 뜻밖이다. 옥시토신의 실체는 무엇일까.

● 5억5000만 년 전 등장

옥시토신은 아미노산 9개로 이뤄진 펩타이드로 호르몬 또는 신경전달물질로 작용한다. 인체에는 옥시토신과 아주 비슷한 분자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바소프레신으로 흔히 항이뇨호르몬이라고 불린다. 신장의 수분 재흡수를 촉진해 오줌을 농축해 양을 줄인다. 

옥시토신이 포함된 노나펩타이드의 유전자는 약 7억 년 전 등장했다. 그 뒤 무척추동물은 지금까지도 하나뿐이지만 척추동물에서는 유전자 중복으로 두 개가 된 뒤 바소프레신 계열(왼쪽)과 옥시토신 계열(오른쪽)로 나뉘어 진화하며 기능이 분화됐다. 사이언스 제공

바소프레신 역시 아미노산 9개로 이뤄진 펩타이드로 옥시토신과는 3번째와 8번째 아미노산이 다르고 나머지 7개는 똑같다. 게다가 두 유전자는 20번 염색체에 마주 보며(전사 방향이 반대) 자리한다. 참고로 아미노산 9개로 이뤄진 펩타이드를 노나펩타이드(nonapeptide. nona는 9를 뜻한다)라고 부른다.

이는 과거 어느 시점에서 노나펩타이드 유전자의 중복이 일어났음을 시사한다. 한 유전자가 중복으로 두 개가 된 뒤 진화가 일어나 기능이 달라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생명체 진화의 역사에서 숱하게 일어나며 다양한 종이 나오는데 기여했다. 그렇다면 그 시점은 언제일까.

수많은 종의 게놈이 해독되면서 노나펩타이드 유전자 분포를 조사한 결과 무척추동물은 1개, 척추동물은 2개를 지닌 것으로 밝혀졌다. 노나펩타이드 유전자는 약 7억 년 전 무척추동물에서 생겨났고 그 뒤 약 5억5000만 년 전 척추동물이 나타난 초기 유전자 중복으로 2개가 됐고 각각 옥시토신 계열과 바소프레신 계열로 진화한 것이다. 

유전자 염기서열을 비교한 결과 포유류를 제외한 척추동물이 지닌 바소프레신 계열 분자인 바소토신(vasotocin)이 척추동물 노나펩타이드의 기원으로 밝혀졌다. 초기 척추동물에서 유전자 중복으로 바소토신 유전자가 두 개가 된 뒤 여분의 유전자가 변이를 일으켜 새로운 기능을 지닌 옥시토신 계열 유전자로 거듭난 것이다. 

지난달 학술지 '커뮤니케이션스 바이올로지'에는 사람의 옥시토신 신호 경로에 관련된 유전자 154개의 기원을 추적한 논문이 실렸다. 유전자 중복으로 옥시토신 계열 유전자가 진화한 게 약 5억5000만 년 전이므로 신호 경로 관련 유전자가 등장한 시기는 그 이후일 것 같지만 분석 결과 36%는 옥시토신보다 나이가 많은 유전자였다.

이 가운데 18%인 28개는 35억~11억 년 전 생겨난 '고대 유전자'로 12개는 박테리아와 아케아 같은 원핵생물에도 해당 유전자가 존재한다. 나머지 18%는 11억~5억5000만 년 전 등장한 '중세 유전자'다. 

사람 옥시토신 신호 경로에 관여하는 154개 유전자의 등장 시기를 나타내는 그림으로, 20개 계통층서(phylostrata. PS)에 넓게 분포한다(숫자가 각 PS에서 등장한 유전자 수). 옥시토신 유전자는 12번째 PS인 약 5억5000만 년 전 초기 척추동물에서 등장했다. 커뮤니케이션스 바이올로지 제공

옥시토신은 등장 직후 기존 유전자를 활용해 신호 경로를 만들어 기능했고 그 뒤 새로 생긴 유전자를 채용해 여러 신호 경로를 만들어 오늘날 다양한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출산과 수유, 유대에 관련된 신호 경로에 관여하는 유전자 대다수는 5억5000만 년 전 이후 등장한 '현대 유전자'로 주로 뇌와 근육에서 발현된다. 

진화의 관점에서 모성애와 부부애 관련 옥시토신 신호 경로는 최근 만들어진 것이다. 3억 년 전 포유동물이 진화하면서 새끼에게 젖을 먹일 동안 애착을 갖게 만드는 옥시토신 신호 경로가 만들어졌다. 기존에 존재하는 보상회로의 도파민 신호 경로, 오피오이드 신호 경로와 연결되면서 어미의 행동이 생겨난 것이다. 옥시토신 신호 경로의 힘은 동물 행동 실험에서 잘 드러난다.

출산 직후 새끼와 떨어져 체취를 각인하지 못한 양은 나중에 새끼가 와도 알아보지 못해 젖을 물리지 않는다. 이때 어미 양에게 옥시토신을 투여하면 새끼로 받아들여 수유를 시작한다. 

여성 또는 일부일처제 동물의 암컷이 보이는 짝에 대한 애착 역시 같은 신호 경로가 재활용된 것으로 행동의 측면에서 겹치는 면이 많다. 노나펩타이드 권위자인 미국 에머리대 정신건강의학과 래리 영 교수는 “여성은 사랑의 진화적, 신경학적 뿌리가 엄마-아기 유대 형성 회로에서 나왔다”고 설명했다.

한편 남성 또는 일부일처제 수컷에서는 바소프레신이 유대 형성에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래리 영은 “원래는 수분 균형만 조절하던 물질이 이제는 인간 수컷이 짝짓기 상대와 유대를 맺는데 관여한다”며 “옥시토신에 민감한 정도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에 좌우되고 뇌의 행동 제어 영역으로 뻗은 바소프레신 합성 뉴런은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에 크게 영향 받는다”며 남녀 차이의 배경을 설명했다.

● 알로스타틱 호르몬

지난 2020년 학술지 '인지과학 경향'에는 옥시토신의 다양한 기능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해 일반화한 기고문이 실렸다. 즉 옥시토신은 동물이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해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는 '알로스타틱 호르몬'이라는 것이다. 알로스타틱의 명사형인 알로스타시스(allostasis)는 생체적응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 항상성)와는 다른 개념이다. 

호메오스타시스가 정온동물의 체온처럼 늘 일정한 범위 내를 유지하게 하는 메커니즘이라면 알로스타시스는 바뀌는 내외 환경에 적응해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진화시킨 메커니즘이다. 이런 관점에서 옥시토신을 포함한 노나펩타이드를 들여다보면 기능의 다양성 밑에 깔린 공통점이 드러난다.

옥시토신은 출산과 수유 등 특별한 환경의 요구에 맞게 몸이 준비할 수 있게 행동과 생리의 기준점을 재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옥시토신이 학습과 기억에 관여하는 현상도 환경 변화에 대한 생체적응으로 보면 수긍이 간다. 최근 발견된 옥시토신의 지방분해 기능 역시 먹이가 부족하거나 장시간 활동으로 에너지가 떨어졌을 때 지방조직에 저장된 중성지방을 에너지원으로 쓸 수 있게 해 살아남게 하는 알로스타시스로 볼 수 있다. 

초원들쥐 연구로 옥시토신을 사랑의 호르몬으로 불리게 했던 미국 에머리대의 신경과학자 래리 영이 지난 3월 21일 56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네이처 제공

며칠 전 뉴욕타임즈에 옥시토신 권위자인 미국 에머리대 정신건강의학과 래리 영 교수의 부고기사가 실렸다. 1956년 생으로 만 56세인 영 교수는 지난 3월 21일 일본 쓰쿠바에서 열린 학술대회 현장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진 뒤 회복하지 못했다. 최근 수년 동안 래리 영은 정신건강에 미치는 옥시토신의 효과에 대한 연구를 집중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못다 이룬 꿈을 후배 과학자들이 이뤄내길 바란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10권), 《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 《식물은 어떻게 작물이 되었나》가 있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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