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언·욕설 특히 부모님 욕은 평생 상처” 후배들만큼 아파한 이근호 “물병뿐 아니라 ‘캔도 날아들었다’는 얘길 들었다” [이근승의 믹스트존]

이근승 MK스포츠 기자(specialone2387@maekyung.com) 2024. 5. 16.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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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39·은퇴)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이근호가 후배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 까닭이다.

그리고선 자책했다. 이근호는 “모든 팬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건 절대 아니”라며 “일부 팬의 과격한 행동에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말했다. 이근호는 이어 다음과 같은 생각을 전했다.

“나와 같은 선배들의 잘못도 큰 듯하다. ‘우린 팬이 있어 존재한다’는 얘길 매일 들었다. 선수는 팬이 어떠한 행동을 하든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요즘 일부 팬은 경기 후 선수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메시지로 입에 담기 힘든 폭언, 욕설을 쏟아낸다. 이와 같은 문제가 5월 11일 인천축구전용구장에서 수면 위로 드러난 게 아닌가 싶다. 지금이라도 정말 바뀌어야 한다. 개선된 응원 문화를 만들고자 K리그 모든 구성원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한국 축구의 전설로 한국프로축구선수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이근호. 사진=이근승 기자
이근호 한국프로축구선수협회 회장. 사진=이근승 기자
사진=연합뉴스 제공
이근호는 11일 인천축구전용구장에서 발생한 일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한국프로축구선수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이근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1983년 K리그 출범 후 최초로 관중이 물병을 던져 선수를 가격하는 폭력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번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정말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일부 관중이 물병을 집어 던진 적은 꽤 있었어요. 이번 사건처럼 선수가 상해를 입지 않았을 뿐이지 정말 위험한 상황이 많았습니다. 선수들은 무방비 상태잖아요. 이번 사건이 더 충격적인 건 이토록 많은 팬이 집단적으로 물병을 집어 던졌다는 겁니다. 선수 시절을 돌이켜봐도 이번 사건처럼 심각했던 적은 없어요.

절대 그냥 넘어가선 안 될듯합니다. 조치가 필요해요. 구단, 한국프로축구연맹, 선수, 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다신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어요. 축구인들이 축구장에서만큼은 코칭스태프, 선수, 프런트, 팬 모든 구성원을 지켜야 합니다.

Q. 경험이 풍부하시잖아요. 현역 시절 관중석에서 물병이 날아든 경험이 있습니까.

있죠. 관중석에서 무언가 날아온다는 자체가 공포예요. 선수는 대단한 위협을 느낍니다. 물병에 맞았냐 맞지 않았느냐는 다음 문제에요. 물병이 날아드는 그라운드에 무방비로 노출됐다는 거 자체가 정신적으로 큰 충격입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경기를 준비하는 등의 일상에 큰 영향을 끼쳐요.

한국 축구가 발전하면서 축구전용구장을 쓰는 팀이 늘었습니다. 팬과 선수 사이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졌어요. 선수들은 팬들이 말하는 거 다 듣습니다. 일부 팬의 폭언, 욕설 등을 들으면 심리적으로 크게 흔들려요. 선수도 사람이잖아요. 정말 많이 아프고, 속상합니다. 너무 심할 땐 그라운드로 들어서는 게 두렵기도 해요. 실수 하나 하면 일부 팬의 폭언, 욕설이 쏟아지니까.

Q. 선수협에서 이번 문제를 주의 깊게 보고 있습니다. 구단, 연맹 등과 소통하면서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고자 하고요. 일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잘해야 합니다. K리그가 이 문제를 잘 해결하고 가야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어요. 11일 경기에 나섰던 선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물병만 날아든 게 아닌 듯합니다. 몇몇 선수가 ‘음료 캔도 날아들었다’고 했어요. 물병도 상당히 위험한데 캔은 정말... 너무 충격적입니다. 당시 그라운드 위에 있던 선수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었고, 두려웠을지 마음이 아픕니다.

Q. 백종범은 그날 인천 서포터스로부터 경기 내내 욕설에 시달렸다고 했습니다. 부모님 욕도 상당했다고 했어요.

(백)종범이는 어린 선수잖아요. 충격이 더 클 겁니다. 마음이 몹시 아플 거예요. 그런 어려움을 혼자서 이겨내야 한다는 게 더 안타깝습니다. 저도 종범이처럼 일부 팬으로부터 폭언, 욕설에 시달린 경험이 있거든요. 여기서 하나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경기장을 찾는 모든 팬이 선수들에게 심한 말을 내뱉는 건 아니에요. 선수들이 잘하든 못하든 격려와 박수를 아끼지 않는 팬이 훨씬 많습니다. 서포터스 내에서도 선수들에게 정도를 넘어선 말을 하는 것만큼은 고쳐야 한다는 의견이 많은 거로 알아요. 내가 이 팀을 사랑한다고 해서 폭력이 정당화되진 않습니다. 이 부분에 공감하고 개선하려고 노력 중인 팬이 상당합니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인천축구전용구장 서포터스석. 사진=이근승 기자
Q. 한국 축구의 전설 이근호도 일부 서포터스의 폭언, 욕설로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줄 수 있습니까.

쉽게 설명 드리면... 상스러운 욕이란 욕은 다 나와요. 심판 판정, 경기 결과 등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았을 땐 정말 과격해지죠. 요즘엔 경기 후 선수의 SNS를 찾아가 심한 욕을 퍼붓는 분들이 계십니다. 정말 입에 담기 힘든 충격적인 수준의 욕이 난무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아내 등 가족 비하도 상당해요. 어린 자식에게까지 저주에 가까운 메시지를 전하는 분도 계십니다.

저와 같은 선배들의 잘못이 크지 않나 싶어요. 저는 과거 싸이월드를 한 적이 있어요. 팬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한동안 운영했었죠. 싸이월드를 탈퇴한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일부 팬의 댓글이었습니다. 그땐 팬들이 폭언, 욕설을 해도 감당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 우릴 응원하는 팬들이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런 거니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만 욕했으면 SNS를 계속해서 했을 거예요. 그런데 부모님께서 저를 향한 심한 욕설들을 보시곤 큰 충격에 빠지셨었습니다. 당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정말 힘들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제 주변 사람들이 아파하는 게 보였습니다. 저는 그런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었습니다. 감내하고 이겨내는 방법뿐이었죠.

Q. 예나 지금이나 이와 같은 문제는 법적 처벌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일부 팬들은 범죄를 범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선수들은 저 사람들이 자기들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폭력의 피해자를 자처했어요. 그러면서 선수들에겐 막말하고 심지어 폭력을 가해도 괜찮다는 비상식적인 인식이 일부 팬에게 심어진 듯한데요. 간단하게 묻겠습니다. 선수들은 언제까지 정도를 넘어선 폭언, 욕설, 폭력에 눈감을 겁니까.

프로 선수가 되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있어요. ‘팬이 있어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겁니다. 팬은 정말 소중해요. 시간과 비용을 들여 현장을 찾아주시는 분들입니다. 열과 성을 다해 응원을 보내주는 분들이죠. 심한 말을 하는 팬도 팬이라고 봤어요. 그런데 이젠 달라지려고 합니다. 선수들이 바뀌고 있어요.

선수협에서 여러 차례 다뤘던 사안인데요. 앞으론 법적 대응을 고려하려고 합니다. 경기장에서 선수를 향해 이물질을 집어 던지거나 선수를 향한 온·오프라인에서의 폭언, 욕설이 쏟아지는 과정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누군가 그러한 잘못된 행위를 시작하기 전까진 조용하다는 거예요.

한 사람이 잘못된 행동을 시작하면 그걸 말리기보단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인식이 깔리면서 하나둘 따라가게 되는 거죠. 이와 같은 행동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얼마나 큰 책임이 따르는 일인지 확실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선수들에게 그라운드는 직장입니다. 선수들은 자신들의 직장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근호는 2014 브라질 월드컵 포함 A매치 84경기에서 19골을 터뜨렸던 전설이다. 이근호는 2012년 울산 HD FC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ACL) 무패 우승에 앞장서며 AFC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아시아 최고의 선수였다. 사진=AFPBBNews=News1
Q. 축구계가 올바른 팬 문화를 만들어 가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인천은 빠르게 대처를 하고 있는 듯해요. 중요한 건 문제가 생긴 직후 단발성이 아닌 올바른 팬 문화를 만들어 가기 위한 노력이 꾸준해야 합니다. 지켜볼 필요가 있어요. 어떤 재발방지대책을 만들어 내고 이어가느냐에 따라서 팬들에게 ‘이런 행동은 정말 해선 안 되겠다’란 인식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인천의 역할이 정말 중요해요.

저는 한국 서포터스 문화가 이렇게까지 과격했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과거가 ‘더 심했다’는 분들도 계시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과거엔 모든 일이 경기장에서 끝났어요. 지금은 경기 후에도 계속됩니다. 선수들이 SNS 메시지로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많이 느껴요. 그런 일을 당한 선수가 어릴수록 경기에만 집중하는 게 대단히 힘듭니다. 구단, 선수, 팬이 올바른 방식으로 소통하면서 더 낳은 응원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Q. 5월 16일 오후 2시 상벌위원회가 열립니다.

제가 상벌위원회에 참석합니다. 선수들이 이번 사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명확하게 말씀드릴 거예요. 저를 포함한 은퇴한 축구인들도 이번 사안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알릴 겁니다. 만약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게 된다면 K리그 응원 문화는 개선되기 어려울 거예요. 해야 할 말을 할 생각입니다.

Q. K리그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K리그는 팬들이 있어 존재합니다. 팬들에겐 늘 감사한 마음이에요. K리그에서 뛰는 모든 선수가 같은 생각입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면서 내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일이에요. 선수들도 감사함이 있어 팬들에게 더 다가가려고 노력 중입니다. 다만 팀을 제아무리 사랑한다고 한들 격한 행동은 자제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세상에 사랑한다고 해서 폭력이 정당화되는 곳은 없습니다. 폭력은 잘못된 겁니다. 말 한마디가 칼날보다 날카로워서 가슴에 박히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선수들에게 좋은 말만 해달라는 건 아니에요. 선수들이 프로로서 느슨한 모습을 보인다거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땐 따끔하게 비판받아야죠. 하지만, 폭언, 욕설은 정도를 넘어선 행위입니다.

K리그 모든 구성원이 서로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잡히길 기원합니다. 선수협 회장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발 벗고 나설 것입니다. K리그 팬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K리그가 더 많은 팬과 함께할 수 있는 매력적인 리그가 될 수 있도록 미약하지만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이근승 MK스포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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