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0년간 배당 수익을 만든 '천재 CEO'를 아십니까 [스프]

심영구 기자 2024. 5. 1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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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智囊, 상하이 토크쇼 ①] 중국 경제를 보는 틀 : 배우와 무대 (글 : 중국자본시장연구소 소장 · (前)미래에셋자산중국 대표이사)


언제는 안 그랬나 싶지만 요사이는 특히나 중국 경제 비관론 일색이다. 지금까지 경제 금융의 도시 상하이에서 20년을 일하며 항상 고민한 문제는 "중국 특유의 경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였다. 그래서 요즘도 현지 경제 지낭(智囊, 싱크탱크)을 만나면 어떤 틀로 경제를 보는지 항상 묻고 배운다.

여기서는 슘페터의 '경제 연구는 이론, 통계 그리고 역사를 통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라는 통찰을 빌려서, 중국 역사 속의 경제 개혁과 그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중국은 인류 21개 문명중 유일하게 원 모습을 유지 중인 통일된 문화다'라고 말했다. 통일(統一)의 '統'은 총합, '一'은 획일이니, 아마도 그런 영향으로 이곳 사람들은 전제나 독재에 조금 덜 민감한 것 같다. 그 연장선에서 역사 속 모든 개혁은 '통일과 중앙집권'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행해졌다.

통일과 중앙집권을 둘러싼 역사 드라마는 같은 역할의 배우들이 출연 비중만 바꿔 가면서 등장한다. 그 배우들은 바로 중앙과 지방정부, 유산계급, 무산계급의 4개 이익집단이다. 중국 역사는 모두 이 네 집단 간의 헤게모니 싸움이라는 틀에서 보면 더 이해하기 쉽다.


위쪽은 4개 집단의 이상적 균형 상태이지만, 서로를 밟고 올라서야 했던 잔혹한 역사적 현실 속에서 결코 존재하지 않는 구조이다.


현실에서는 위 그림처럼 중앙이 강하면, 지방은 약해지고, 무산계급은 늘어나고, 부자는 줄어들었다.

강한 중앙정부는 초기에는 국가를 안정시키지만, 장기적으로는 결국 부패와 폭정, 기아로 지방 세력들이 곳곳에서 봉기하였다.


위 그림처럼 지방이 득세하면, 중앙은 다시 쪼그라들고, 그 혼란을 틈타서 돈을 버는 부자가 늘고, 가난한 자들의 불만은 다시 변화의 에너지가 된다.

중국 왕의 성씨는 24번 변했지만, 네 집단의 싸움과 그 승패는 위 두 가지 구조로만 수렴했다.


단 하나의 예외는 유산계급이 사라진 30년(1949~1977)이다. 중앙의 통제 하에 대약진, 문혁 등 기괴한 사건들의 결과 이 나라 국민들은 극빈 상태로 완전하게 평등해졌다.


위의 4대 기본제도는 중국 중앙집권을 떠받쳐온 기둥이다. 네 배우들의 역할 비중도 그 틀 속에서만 가능했다.

군현제도는 중앙과 지방 권력배분 모델로, 현재 중국도 중앙이 지방장관을 파견한다. 존유제도는 유교를 통한 사상통제로, 여전히 사회의 도덕적 뿌리와 판단의 기준이다. 과거제도는 엘리트 관리와 통제를 위한 것이며, 지금은 수능과 공무원 시험으로 변형 유지 중이다. 국유제도는 중앙 재정 강화를 위한 중국식 경제 제도의 시그니처로 2,600년간 사라진 적이 없었다. (다만 견고한 세 가지 기둥과 달리 경제 기둥은 불안정하여 여전히 보완이 필요하다.)

이런 중국의 시스템을 서구적 시각으로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만들어져 온 역사를 알면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역사적 전환점이 된 주요 개혁을 설계했던 혁신가들이 중국을 보던 틀을 알면 오늘의 중국 경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근래에는 좀 어려워진 중국이지만 인민이 굶어 죽던 나라를 G2 반열에 오르도록 설계한 사람은 등소평이다. 한데 이미 2,600년 전에 등소평보다 더 담대한 성과를 낸 미스터리한 인물이 있었다.
 

케인즈를 2,600년 앞선 천재적 경제학자 + 인류 역사상 최대 수익을 낸 CEO

진나라의 천하 통일 이전 BC 8세기 황하 유역에는 봉건시대 왕이 후손 및 공신들에게 땅을 나눠서 형성된 제후국이 1천 개가 넘게 있었다. 그중 춘추오패(五覇)인 제(齊)나라 왕은 스스로 색(色), 식(食), 땅(田)을 좋아하는 三好先生이라 칭한 환공(桓公)이고, 그를 보좌한 재상은 사업을 세 번 말아먹고, 성품도 쪼잔한 탈영병 관중(管仲)이었다.


그저 그래 보이는 이 두 사람의 조합이 중국을 넘어 동북아까지 막대한 영향을 준다. 비즈니스도 크게 실패하고, 경제학조차 접한 적이 없었던 관중이 어떻게 한 세대 만에 변방의 작은 나라를 경제 초강국으로 만들었을까?


첫째, '사농공상(士農工商), 사민분업(四民分業)'이다.

전문가 집단을 만들기 위해 군인, 농민, 제조, 상인은 같은 업종 사람들끼리 동일 지역에 거주하게 했다. 서로 자주 보니 능률이 오르고, 어릴 때부터 가족들에게 배우면서 장인으로 자라났다. 유럽보다 최소 1천 년은 빨리 진행된 사회적 분업으로 제나라의 선진적 제조업 수준은 '고공기'(考工記)란 책에 기록되어 있다.

둘째, 작은 것은 풀어주고(放活微觀) 큰 것만 통제했다(管制宏觀).

온 나라에 단일세를 적용한 자유무역지대로 만들어 원가를 낮추는 등 비즈니스 환경을 확 바꾸었다. 매 30리 거리마다 객사(여관)를 만들고 음식, 말먹이, 물류 창고를 설치하여 외국 상인은 몸만 오면 되었다. 30리 12km 길은 반나절 걷는 거리로 객사 주변에는 자연히 장이 섰다. 외국 상인이 빈 수레 한 대로 오면 공짜 식사를 제공했고, 두 수레면 말먹이를, 세 수레를 끌고 오면 몸종까지 무료 식사를 주었다. 우호적 환경으로 장사치들이 찾는 플랫폼을 만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수도 임치(현재 산동성 즈보어(淄博), 최근 바비큐로 유명)에 기방을 개설했는데, 이 기녀들은 최초의 정부 공인 엔터테이너다. '女阊(여창)'이라고 불린 기방이 300창이었는데, 1창은 25개, 총 7,500개다. 한 업소마다 기녀가 4~5명이라면 수만 명, 술과 음식, 악사, 의복, 화장품 등 관련산업까지 포함하면 오늘날 중국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부동산업만큼 큰 산업이었다.

물론 지금 잣대로는 범죄 도시라 비난할 수 있지만, 그때는 일자리 창출과 소비 활성화를 위한 신성장 동력이었을 것이다. 이후 2천 년 동안 이 업계 사람들은 사업장마다 관중의 상을 두고 수호신(守護神)으로 섬겼다.


반면 백성의 민생과 관련된 거시적인 것은 철저히 통제했다. 식량 관리를 위해 농업세를 부과했는데, 세율은 풍작이면 15%, 중간이면 10%, 나쁘면 5%, 아예 흉년에는 다 면제해 주었다. 자기 사업은 다 실패했던 비즈니스맨이었지만, 흉년이면 어김없이 투기꾼이 나타나서 물가를 교란시켜 민심이 흔들린다는 것도 잘 알았다. 역사상 최초로 국가 식량 저장 시스템을 만들어 식량 가격은 물론 민심까지 관리했다.

셋째, 소비로 경제를 키웠다.

그의 '부자의 사치로 빈자가 일한다(富者靡之, 贫者为之)'는 말 때문에 훗날 유가(儒家)들에게 맹비난을 받았다. 그는 계란도 조각하여 삶아 먹고, 땔감 나무도 조각한 후에 태우는 극단적인 소비를 행했다. 그래야 일자리가 생기니, 능력이 있는 부자는 더 사치와 소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후일 황제들이 흉년에 궁전을 짓거나, 미국의 대공황 후 뉴딜 정책도 같은 맥락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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