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6일!] 다시 찾아온 '민주주의의 시련'… 군사정권의 시작

김가현 기자 2024. 5. 16.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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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16일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의 제2공화국은 출범 9개월 만에 무너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은 1961년 5월16일 오전 3시쯤 장교 250명·병사 3500여명과 함께 서울의 주요 기관들을 점령했다.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지만 이를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선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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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5·16 군사정변
1861년 5월16일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로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무너졌다. 사진은 지난 1970년 4월 포항1기 제철소 착공식에서 착공버튼을 누르고 있는 (사진 왼쪽부터)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열 부총리. /사진= 머니투데이
1961년 5월16일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의 제2공화국은 출범 9개월 만에 무너졌다. 박정희를 수반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등장하며 본격적인 군인 내각 체제가 시작됐다.

육군 소장 박정희와 김종필을 비롯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 장교들은 주한미군과 주한미국대사관의 공식적인 반대 성명에도 윤보선 대통령을 회유함으로써 국무총리 장면을 사퇴시켰다. 이들은 봉기 60여시간 만에 제2공화국을 무너뜨렸다.


혼란 속 새로운 리더로 등장한 박정희 대통령


1960년 4·19 혁명으로 인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하야 이후 대한민국은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가 이끄는 정부 하에서 심각한 혼란을 경험했다. 정치적 부패와 무능력으로 인해 국민의 불만은 커졌고 이승만 정부 10여년 동안 억눌려 왔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각종 데모로 이어졌다.

또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국제 정세의 불안정은 국가 안보에 대한 우려를 일으켰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군 내부 인사들은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은 1961년 5월16일 오전 3시쯤 장교 250명·병사 3500여명과 함께 서울의 주요 기관들을 점령했다. 오전 3시40분쯤에는 남산 육군본부까지 장악했다.

소식을 들은 장면 국무총리는 오전 4시쯤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했고 미국의 지원으로 군사 세력을 진압하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며 장면 내각은 모두 사퇴했다. 윤보선 대통령 또한 체념하면서 군사정변은 성공을 거둔다.

오전 5시쯤 육군본부와 중앙방송국 뉴스가 정변 소식을 알렸다. 이와 함께 정변 세력은 삐라 10만장을 서울에 대대적으로 살포했다.

결국 박정희 소장은 1963년 12월17일 제3공화국을 수립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궁정동에서 올린 총성… 또다시 좌절된 '민주주의'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격당해 사망했다. 사진은 지난1월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해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영전에 분향하고 있는 구자근 국민의힘 의원. /사진= 뉴스1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지만 이를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국민은 이를 민주정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직을 1차에 한해 중임이 가능하게 했으나 박정희는 1969년 3선 개헌을 통해 1967년에 이어 1971년 다시 대통령이 됐다.

3선으로도 만족하지 않은 박정희는 1972년 10월2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끝내 유신 헌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단독입후보로 다시 8대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김재규의 총성이 울리기 전까지 박정희 대통령은 16년 동안 5·6·7·8·9대 대통령으로 중임하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다시 한번 좌절시켰다.

영원할 듯 보였던 박정희 정권은 1979년 10월26일 박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격당해 사망하면서 막을 내렸다. 당시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있던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김재규 부장은 연회 도중 자신의 숙적이었던 차지철 경호실장을 쏜 후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총격을 가했다. 박 대통령은 바로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이송 중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김 부장은 바로 육군본부로 가서 군을 장악하려 했지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에 의해 체포됐고 대한민국에는 계엄령이 선포됐다. 이후 10·26 사건에 대한 조사를 맡은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이 계엄사령관이었던 정 총장을 체포하고 또다시 군을 장악하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전두환 소장과 9사단장이었던 노태우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가 권력을 잡게 된 이 사건이 지난해 개봉한 영화 '서울의봄'의 배경이 된 12·12군사반란이다.

김가현 기자 rkdkgudjs@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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