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가해자 이름 석 자, 희생자 묘비에 새겼다…비극 반복 막으려고

고귀한·강현석 기자 2024. 5. 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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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서 나주 가려던 형진씨
계엄군 도로 차단에 발 묶여
“언제쯤 풀리냐” 물었다가
전교사 포병학교 상사에 참변
지난 13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제1묘역 김형진씨 묘비 뒷면에 1980년 5·18 기간 시민을 상대로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계엄군의 이름과 범죄 행위가 적혀 있다. 유족들은 김씨를 죽음으로 내몬 그날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묘비에 당시 사건 내용을 적어놨다. 강현석 기자

지난 13일 5·18민주화운동 희생자가 잠든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는 제44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추모 발길이 이어졌다. 고 김형진씨 묘비 앞에도 작은 꽃다발이 놓였다.

5·18 당시 계엄군이 휘두른 대검에 찔려 중상을 입었던 형진씨는 후유증을 앓다가 1983년 11월 3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고향 선산에 묻힌 그는 1990년 정부로부터 5·18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1997년 5월 5·18묘역이 조성되면서 이장됐다.

형진씨 묘비는 남다르다. 뒷면에 그를 죽음으로 내몬 계엄군 이름과 주소를 새겼다. ‘충남 ○○군 출신 포병학교 소속 A상사가 대검으로 흉복부를 찔러 수술 후 사망했다.’ 5·18묘지에 안장된 995명의 묘비 중 유일하게 가해 계엄군 이름을 적었다.

경향신문이 입수한 ‘전교사(전투병과교육사령부) 보통 군법회의 판결문’과 큰형 무정씨(80) 인터뷰로 형진씨 생애와 사건을 재구성했다.

형진씨는 전남 나주 영산포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성실한 청년이었다. 형제들을 대신해 고향 집에서 부모를 모셨다. 무정씨는 결혼해 광주에 터를 잡았고 나머지 형제들도 생계 때문에 타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형진씨는 나주에서 가축 파는 일을 했다. 쾌활한 성격으로 손님과 주변 상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1980년 5월20일 5·18이 발생한 지도 모르고 가축을 팔려고 광주로 갔다. 공수부대가 광주 도심에 투입됐지만 도로까지 차단된 상황은 아니었다.

5월21일 계엄군이 옛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발포를 자행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계엄군은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면서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광주에서 외부로 연결되는 전화도 모두 끊었다. 광주를 고립시키는 ‘봉쇄작전’에 들어간 것이다.

형진씨는 형 집에 머물며 가축을 모두 팔았지만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됐다. ‘송정리역에서 기차라도 타고 나주로 가야겠다’며 5월23일 집을 나섰다. 교통이 끊겨 송정리역이 있는 전남 광산군 송정읍(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까지 12㎞를 걸었다.

이곳에서도 무장한 계엄군이 길을 막고 있었다. 형진씨는 계엄군에게 다가가 “영산포까지 가야 하는데 차가 안 다닌다. 언제쯤 풀리느냐”고 물었다. 군인들이 대답을 머뭇거리던 사이 군 오토바이 한 대가 멈춰 섰다. 상사 계급장을 단 그는 M16 소총에 대검까지 착검한 상태였다. 광주 포병학교 소속 A상사였다.

무정씨는 44년이 흐른 지금도 A상사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한다. 무정씨는 “지금도 비슷한 이름만 들어도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손이 떨리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며 동생 이야기를 이어갔다.

A상사는 형진씨와 주민들에게 “이 새끼들 빨리 안 들어가?”라며 욕을 했다. 형진씨가 “왜 좋은 말로 하면 되지 욕설을 합니까”라고 항의하자 M16 소총 개머리판이 날아들었다. 다른 계엄군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위협을 느낀 형진씨는 무작정 뛰어 150m 정도 떨어진 한 음식점에 숨었다. A상사는 그곳까지 쫓아와 대검으로 형진씨 등 뒤에서 오른쪽 가슴 밑을 찔렀다. 음식점 주인과 다른 손님들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형진씨가 음식점 밖으로 도망치자 이번에는 왼쪽 허벅지를 찔렀다.

1980년 6월24일 국군광주통합병원에서 고 김형진씨에게 발급한 진단서. 유족 제공

무정씨는 “생전 동생은 ‘당시 살려면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는 말을 자주 했다”면서 “현장을 겨우 벗어나 인근 민가 마당에서 의식을 잃었다”고 했다.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주민들이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겼다. 형진씨는 곧바로 수술을 받았다. 폐 일부를 도려냈다. 파손 정도가 심각한 늑간 동맥은 다시 잇지 못했다. 갈비뼈도 일부 잘라냈다.

당시 수술을 집도한 군의관은 가족들에게 “다시는 몸을 쓰는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6월20일까지 국군통합병원에 있었던 형진씨는 조선대병원으로 옮겨 7월5일까지 치료를 받았다. 후유증으로 인한 늑간 신경통과 흉통 진단도 받았다.

A상사는 국군통합병원으로도 찾아왔다. 그는 “형진씨가 간첩과 연결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또 “계엄사 연행에 불응해 대검으로 찔렀다”는 핑계도 댔다.

가족들은 이 행동에 분노했다. A상사 말을 믿지도 못했다. 가족들은 형진씨가 대검에 찔린 마을로 직접 가 목격자를 찾아 나섰다. 해코지를 당할까 증언을 꺼리던 주민들은 가족의 간절함을 접하고 A상사가 형진씨에게 저지른 만행을 진술했다. 그가 인근 마을에서 3년 동안 거주한 전교사 포병학교 소속 상사라는 것도 알려줬다.

1980년 5·18 기간 계엄군의 잔혹한 폭력으로 사망한 김형진씨의 생전 모습. 유족 제공

신군부가 유혈진압을 했고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이었지만 진상을 알게 된 가족들은 A상사를 그냥 둘 수 없었다. 6월24일부터 무정씨와 어머니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와 광주·전남계엄사령부에 사건 개요와 함께 A상사를 처벌해 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5차례나 보냈다. 어머니는 탄원서에 “선량한 국민을 대검으로 무자비하게 찌른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적었다. 무정씨는 “어떻게 이런 잔인한 짓을 할 수 있는지 인간으로조차 생각되지 않는다. 강하게 처벌해 달라”고 썼다.

명백한 범죄행위에 계엄사령부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교사 헌병대는 무정씨가 제출한 탄원서를 토대로 A상사를 6월27일 구속했다. 헌병대는 A상사에게 형법상 중상해죄를 적용하고 전교사 계엄 보통군사법원에 구속 송치했다. A상사는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자신의 죄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법정에서 그는 “나도 피해자다”라거나 “나는 부사관이지만 내 자식은 장교로 군에 보낼 것”이라고 했다.

군 법무관이 A상사에게 “형진씨 가족에게 사과하고 피해를 보상하고 합의하라”로 했지만 그는 이마저도 거부했다. 전교사 보통군사법원은 A상사 범죄를 모두 사실로 인정하고 1980년 8월25일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단죄는 반쪽에 그쳤다. 형이 선고된 4일 뒤인 8월29일 전교사 보통군사법원의 관할관인 전교사령관 소준열은 재량으로 A상사의 형 집행을 면제해줬다. 경향신문 취재결과 60여일 동안 구금됐다가 풀려난 A상사는 이등병으로 강등돼 이날 전역했다.

A상사가 풀려난 이후 병원에서 퇴원한 형진씨는 빠르게 야위어 갔다. 늑간 신경통과 극심한 호흡 곤란을 겪었다. 형편이 넉넉지 않아 이후에도 제대로 된 병원 치료를 받지 못했다. 걷지도 못하고 집에서 누워만 생활했던 형진씨는 A상사가 석방된 지 3년2개월 뒤 세상을 떠났다.

5·18 44주년 기념식을 열흘여 앞둔 지난 7일 고 김형진씨의 큰형 무정씨가 국립5·18민주묘지의 동생 묘비를 어루만지고 있다. 고귀한 기자

지난 7일 형진씨 묘역을 찾은 무정씨는 “형이 왔다. 잘 있었니”라며 정다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묘비에 손을 얹고 2~3분 동안 눈을 감았다가 뜬 그는 비문에 쌓인 먼지를 손으로 구석구석 닦아냈다.

무정씨는 “A상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동생 묘 앞에 무릎을 꿇리고 싶다”면서 “진정한 사죄가 없는데 어떻게 계엄군에 대한 용서와 화해를 이야기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무정씨는 동생 묘역을 떠나기 전 묘비 한쪽에 새긴 글귀를 소리 내 읊었다. “하느님 다시는 이 땅에서 국민의 군대가 정권 찬탈의 목적으로 이용돼 국민에게 총칼을 휘두르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소서.”

고귀한 기자 go@kyunghyang.com,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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