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공백’ 장기화에 대형병원 분원 설립도 멈췄다

천호성 기자 2024. 5. 16. 05: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수도권 10개 분원 줄줄이 지연
공사비 증가에 병원 재정 악화
비상경영으로 사업 무산 위기
수도권 쏠림 우려엔 ‘희소식’
“사업 전면 재검토 유도해야”
2027년 완공을 목표로 하는 서울 송파구 위례신도시의 가천대서울길병원 예정지 벌판에 지난 14일 중장비가 멈춰 있고 잡풀이 자라고 있다.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서울 송파구 거여동 위례신도시에는 축구장 6개 넓이(4만4000㎡)의 ‘노른자위’ 땅이 수년째 잡초만 무성한 채 놀고 있다. 가천대길병원이 2027년까지 1000병상 규모의 ‘가천대서울길병원’을 짓기로 한 터다. 지금쯤 기초공사를 마쳤어야 하지만 벌판으로 남아 있었다. 공사비가 폭등한데다 최근 전공의(인턴·레지던트) 집단행동으로 병원 재정도 어려워져 프로젝트가 무산 위기에 놓인 결과다.

15일 의료계와 보건복지부 설명을 종합하면, 2029년까지 수도권에서 대학병원 8곳이 10개의 분원(총 6600병상) 설립을 추진 중이다. 가천대서울길병원뿐만 아니라 서울대병원(경기 시흥 배곧신도시), 서울아산병원(인천 청라국제도시), 연세의료원(인천 송도신도시) 등의 분원이 예정돼 있다. 하지만 병원의 재정 악화와 공사비 인상까지 겹치며 포기할 상황이거나 진척이 더디다.

가천대서울길병원은 2027년 개원이 목표였지만, 아직 사업비 조달을 위한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의료 공백 장기화로 가천대길병원이 직원 무급휴가 신청을 받는 등 비상경영에 들어가면서 분원 건립 동력이 떨어졌다. 최근 원자재값 급등과 인건비 상승으로 예상 공사비가 크게 불어, 사업비 책정·설계 방향 등을 두고 시행사·길병원·시공사의 이견도 커진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단 관계자는 “의료 공백 사태 이후 병원 쪽 내부 의사결정이 늦어지고 있다”며 “피에프 대출을 받기로 약정한 기한 내에 병원 규모·설계안 등을 확정해 대출을 일으키지 못하면 사업 자체가 무산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대의료원 역시 2028년까지 경기 과천·남양주시에 각각 500병상짜리 분원을 계획했지만 공사의 첫 단계인 관할 시청 인허가도 추진하지 않고 있다. 병원 건립에 들일 ‘실탄’이 부족해지면서다. 고려대 안암병원은 최근 전공의 이탈로 5개 병동에 환자를 받지 않으면서, 지난 2월까지 950명이던 일평균 입원 환자가 이달 600여명으로 줄었다. 월 진료 수입은 이전보다 15∼20% 줄었다. 이 병원 관계자는 “기존 병원 직원 월급을 밀리지 않는 것이 최우선이 됐다. 간호사 신규 채용 등을 미루며 인건비를 졸라매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2026년 완공 예정이던 연세의료원의 송도세브란스병원 공사는 터파기 이후 멈춰 있다. 애초 4500억원 안팎으로 예상됐던 사업비는 8000억원 이상으로 뛴 반면, 비상경영에 들어간 연세의료원은 공사비를 마련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세브란스병원 본원 등 산하 3개 병원은 3월부터 간호사·일반직 1만2000여명에게 무급 휴직을 받는 등 지출을 졸라맨 상황이다. 올해 착공을 목표로 하는 서울대병원 분원도 공사비를 조달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서울대병원은 기존 500억원이었던 마이너스통장 한도를 지난 3월 말 1000억원으로 두배 늘리는 등 비상경영에 들어갔다. 시공을 맡기로 한 현대건설에서 서울대병원이 감당하기 힘든 설계안과 사업비를 제시할 경우 시공 계약이 무산될 가능성이 있다.

대형병원들이 경쟁적으로 추진한 분원 설립에 차질을 빚은 것은 전공의 집단 사직에 따른 의료 공백 장기화 영향 탓이 크다. 매월 수십억원의 적자를 보거나, 마이너스통장을 마련할 정도로 재정이 나빠진데다 언제 나아질지 점칠 수도 없다. ‘값싼 인력’인 전공의에게 병원 운영을 과도하게 의존한 영향이 크다. 지난해 12월 기준 서울 ‘빅5’(삼성서울·서울대·서울아산·서울성모·세브란스) 병원 의사 중 전공의 비중은 평균 39%였다. 절반에 가까운 인력이 한꺼번에 빠져나가자 병원들은 진료 축소, 직원 무급휴직 등에 들어갔다.

반면 수도권 대형병원 분원 사업의 무더기 지연이 전체 보건의료체계에는 오히려 ‘희소식’이란 게 중론이다. 분원이 계획대로 들어서면 비수도권 의료기관의 의사·간호사를 대거 빨아들이고, 환자들의 ‘수도권 러시’도 더욱 심해져 지역의료 붕괴를 가속화한다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돼왔다. 정부는 뒤늦게 300병상 이상 종합병원을 개설할 때 보건복지부 장관 승인을 받도록 의무화하는 의료법 개정에 나섰지만, 이미 건축허가 등을 받은 대형병원들의 분원 설립 계획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에 이번 기회에 이들이 사업을 줄이거나 접을 수 있도록 길을 터주자는 제안도 나온다. 임준 인천시의료원 공공의료사업실장은 “분원 추진 의지가 약해진 병원들은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도록 관계 당국이 의료기관, 관할 시도와 협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